오늘 말씀에는 놀랍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15절에 유대인이 주님에 대해 놀라는 것 하나와 21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상히 여기다’라는 단어다. 그런데 말씀을 읽다보니 놀랄 만한 것들이 더 보인다.
첫째는 14절에 주님께서 성전 (공간적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외부, 히에론)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주님은 ‘공인된’ 율법사나 랍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명절에 성전에서 가르치신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골에서 올라온 이름없는, 그리고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무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주의와 계급주의로 똘똘 뭉친 폐쇄사회에서 ‘누구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나? 놀랍다…
둘째는 바로 그 다음에 유대인들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는 대목이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이 ‘배우지 않은’ 것을 바로 알아낼 수 있었나? 그것은 후에 베드로의 예에서도 발견된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 4:13) 그 당시 모습을 잘 모르지만 (벌써 2천 년 전 일이니…) 아마도 학문이 있으면 옷 입는 것이 달랐으려나? 그런데 그런 사람도 가르칠 수 있는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열려 있었나?
셋째로 19절 중간에 원어에는 ‘그리고 kai’ 가 있다. 즉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여기는 그런데의 뜻이 될 수 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원어는 마침표도 없고 장절구분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이어진다. 그래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20절에 붙어야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고 의지하던 모세가 준 율법에 대해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가? 바리새인들은 그 삶 자체가 율법을 위한 삶을 살았는데 주님은 그러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데 만약에 주님께서 오늘 오셔서 ‘너희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정말 예배하는 자는 없다’라고 하신다면 놀라지 않을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너희중에 나를 따르는 자는 없도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거기에다 ‘오히려 너희들은 나를 죽이는구나’ 라고 말씀하신다면?
넷째로 사람들은 놀라며 ‘당신이 귀신 들렸다.’라고 한다. 그 무리의 사람들도 주님의 말씀에 놀랐지만, 성령이 충만하신 주님께 귀신들렸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도 놀란다. 이 귀신은 ‘다이몬’으로 영어에서 제대로 된 번역은 demon이지 devil(마귀)가 아니다. ‘더러운 귀신’에서의 ‘귀신’은 ‘영’인데, 더러운 영이다. 즉 더러운 영이 다이몬이다. 보통 ghost나 phantom(유령, 헛것)은 형체가 있는 반면, 이 ‘다이몬’은 형체가 없는 더러운 존재들이다. 아무튼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묻는 유대인 중에는 주님을 죽이려는 이들도 분명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놀라지 않았을까?
다섯째로 21절의 ‘한 (one) 일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한 일’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 사건을 말씀하는 것 같고 그래서 뒤에 설명을 하신다. 유대인들은 그 한 사건에 대해 이상히 (놀랍게) 여긴다. 22절의 원어에는 ‘디아 투토’ 즉 ‘그러므로’라는 말이 있다. 즉 ‘너희들이 내가 했던 이 ‘한 일’에 대해 놀랍게 여기는데, 그래서 모세가 너희들에게 할례를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며 할례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할례는 창세기 17장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난 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모세가 율법에 할례를 명하기는 했지만 그 기원은 아브라함이다. 모세가 창세기를 비롯한 소위 모세오경을 기록했다고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그에 대한 논쟁도 많다) 유대인들이 항상 놓치고 있는 것은 모세 시대 훨씬 이전에 많은 것들이 이미 주어지고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 앞의 것들을 대체하고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세분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의 문제에 있어서 안식일의 규례를 뛰어넘는데, 안식일이 제일 중요한 문제지만 실행면에 있어서 할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점을 들어 주님이 행하신 ‘하나의 일’의 공의로움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 처럼 나도 혹시 주님의 행하심에 대해 이상히 여기거나 놀랍게 여기는 것이 있는가?
주님, 나를 해방하소서. 내 영 자유케 하소서. 주께서 원하시는 그 핵심과 본질을 만지게 하소서. 주님의 광대하심과 그 은혜의 풍성함에 놀라게 하소서. 주는 놀라우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