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지방차별에 의한 배척
주님 당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남쪽 넓은 지역이 유대땅이고 그 위에 사마리아가 있고 그 위에 작은 지역인 갈릴리가 있다. 갈릴리 중 산악지역인 후미진 곳이 바로 주님께서 어린 시절을 많이 보내신 나사렛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촌놈’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인물이 나겠냐고 물었을 정도로 아마도 아주 깡촌이었던 것 같다.
그런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 어촌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으니 세상 기준으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조합이었다. 유학파도 아니고 정통 바리새인도 아니고 유지도 아니며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르는 무리들이 특출난 사람들도 아니었다.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배척을 받으셨지만 유대땅에서는 아예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한다. 주님은 예언한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지 그들에게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하면 안되기 때문에 유대땅을 피하신다. 순교만이 능사가 아니다. 순교도 은혜다.
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1절 말씀에서 지역감정이 확 드러난다. 물론 요한이 어떤 ‘지역감정’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기록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출신인 갈릴리와 유대를 같이 보지 않는다. 아마도 유대인들 먼저 갈릴리 땅을 우습게 본 것 같다. 이스라엘 그 조그만 땅 덩어리 중에서도 갈릴리가 업신여겨졌던 이유는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부터의 거리상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마리아 땅 건너편에 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은 주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도 말했다 (요 8:48).
-- 가족도 예수님 안으로 믿지 않음
4절에서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자신을 드러내고 넓은 곳에 가서 좀 큰 일을 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한은 5절에서 그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님 안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그의 능력과 기적 행하심으로 소위 ‘입신양명’을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데 믿지 않던 예수의 형제들이 후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 약 2:1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는 더 이상 예수님을 자신의 육신의 형님이 아니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고백한다.
--주님의 때와 우리의 때
주님은 주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너희 때’ 즉 주님의 형제들의 때 그리고 우리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사실 우리에게도 때가 있다. 벧전 5:6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라고 말씀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때가 있음을 말씀한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그것은 뒤의 구절 즉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주님에게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상관이 없기에 명절에 올라가는 것은 아무때나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에는 때가 있지만,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는 때가 없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해야하며, 믿을 때에 오늘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또한 구원의 날이다 (고후 6:2).
--거짓말 하는 것 같이 보이시는 주님
8절에서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시고 10절에는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고 해서 주님이 거짓말 하셨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잘 읽어보면 ‘아직’이라는 말이 두번이나 있다. 주님의 말씀을 오해할 때가 종종있다. 말씀 중 많은 부분을 오해할 때도 있다. 잘 보아야 한다. 주님에 대해 신뢰하고 주님은 거짓말 하지 않는 분임을 전제로 한다면 오해는 풀린다. 그것이 겸손의 문제고 또한 세계관의 문제다. 내가 어떤 세계관이 있느냐에 따라 창조론과 진화론을 구분할 수 있고, 그 둘 ‘론’의 모자람도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 창조’론’자가 아니다.
--유대인 갑질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는데, 사회적으로 힘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권리행사를 넘어서 횡포를 부리는 짓을 일컷는다. 주님 당시도 다르지 않아서 특히 이전 남유다 북이스라엘 분열후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사마리아로 변질되고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유다땅은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땅이라 아마도 그들에게는 종교적 자부심이 있었고, 더우기 그 땅에는 구약의 결정체인 ‘성전’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인구적으로 종교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던 유대인들에 대해 ‘무리’들은 그들의 갑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주님이 진정한 갑이심에도 갑질을 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노블리쥬 오블리제가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이시다. 주님은 땅에 오셨고, 모든 것을 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갑질’이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해야할 진정한 갑질이다.
주님, 주님께서 이루심으로 우리 앞에는 문이 열려져 있음을 봅니다. 온 우주의 진정한 갑이신 주님을 따름으로 모든 것을 소유했음을 믿고 내가 소유한 것으로 만이 아닌 주님의 공급하심으로 살 수 있게 도우소서. 내 눈을 열어주시고 새롭게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