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이 시제는 현재로서 과거 현재 미래 모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엄밀히 말해서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마치 횟집가서 회뜨기 전에 '살아있네!'하는 표현도 몇분 후면 죽은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 그리고 그 분의 생명을 소유할 때만이 '살아있다'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에 '유대인들'이 수근 거리는 것은 아마도 당연할지 모른다. 옆 동네 김씨 아저씨 아들이 갑자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신적으로는 결코 신비롭거나 사람들의 인기를 끌만한 분이 아니셨다. 그런데 그런 문제에 대해 주님은 변명이나 설명이 없이 진리만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옆 동네 김씨네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리'라는 말에서 '유대인들'로 정체가 드러난 이들에 대해 그들이 '기록된 바'로 말한 것에 대해 주님도 '기록되었은즉' 이라고 대답하시며 다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로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변명 혹은 설명이 필요 없고, 사람에게 의탁하시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고, '아버지께로 듣고 배운 사람'은 주님께로 오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 자체는 아버지께서 주신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46절 '하나님에게서 온 자'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하나님 옆의 존재'라는 뜻인데 거기서 사용된 전치사는 '파라'라는 단어로 '`로부터, ~옆에, ~의, ~가까이' 등의 뜻이다.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고, 동시에 옆에 계시고 그분의 아들이며 항상 가까이 계신분이다. 주님만 아버지를 대면하여 보신 분이시다.
47절은 '아멘 아멘으로 그대들에게 말하오. 내 안으로 믿는 그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소'이며 '내 안으로'가 있다. 주님 안으로 믿을 때부터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
그러면서 주님은 생명의 떡, 그리고 살아있는 떡이심을 말씀하는데 누구든 주님의 살 (사르크스)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림받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51, 53절에서 주님의 ‘먹는 ’이라는 단어와 52절에서 유대인들이 말하는 ‘먹는’ 단어는 같지만 54절 부터는 좀 과격한 단어로 ‘씹어먹다’는 단어가 쓰인다. 즉 54절은 ‘나의 살을 씹어 먹고 (현재 진행형) 나의 피를 마시는 (현재 진행형) 사람은 영원하신 생명을 가졌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하리라’ 라고 할 수 있다.
55절의 어순도 조금 특이하다. '참된 양식' '참된 음료'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나의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나의 피는 참으로 음료이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56절에서 다시 ‘씹어 먹음’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살을 씹어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역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즉 이러한 ‘먹고 마시는’ 것이 없다면 주님과 관계 없음을 말씀하시는데,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은 우리로 주님의 살을 씹어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인도 한다.
처음에 고상하게 그냥 ‘먹다’로 표현하신 것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쟁론 거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아예 ‘씹어 먹다’라는 표현으로 너무 과격하게 들린다. ‘먹다’는 ‘φάγω’라는 단어로 계시록에서 두루마리를 삼켜버린 것 처럼 ‘삼키다’의 뜻이 있지만, ‘씹어 먹다’는 ‘τρώγω’라는 단어로 견과류 같은 단단한 것들을 아작아작 씹어서 잘개 부숴 먹는 뜻이다. 주님을 ‘삼킬 수도’ 있지만 ‘씹어 먹’을 수도 있다. 창세기에서 인류의 죄가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먹음으로 들어온 것 처럼, 인류의 구원과 영생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을 먹음으로 얻는다.
그래서 성찬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제 의식으로 하는 성찬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침례도 필요없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물침례를 강조하고 있고 성찬 역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말씀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읊조리며 씹어 먹기도 하지만, 동시에 함께 모여 성찬을 통해 주의 살과 피를 받으며 주님과 하나되고 성도들과 하나됨을 경험한다.
살려면 먹어야 하는데, 조상들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먹는 것들은 결국 우리를 살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살과 피는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여 진정으로 살게한다.
--주님을 씹어 먹는 방법 – 큐티
그런데 주님을 ‘먹는’ 것과 ‘씹어 먹는’ 것의 차이는 뭘까? 계시록의 두루마리를 삼킨 것은 두루마리가 이제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배에는 쓰게 되었다. 즉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먹으면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그냥 삼키면 소화에 문제가 있다. 말씀을 읽는 것도 역시 그렇다. 처음에는 말씀이 달아서 많은 내용을 읽게 된다. 하지만 후에 경험하는 것은 그 많은 구절들이 내 안에서 잘 정리가 되지 않고 삶에서 나타나거나 적용될 때에 그 말씀끼리 안에서 갈등하는 (사실은 나의 육신과 말씀이 갈등하는 것이 많겠다) 것을 경험한다. 말씀을 조금 더 배우고 경험하게 되면 말씀을 많이 읽는 것 (먹는 것) 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쪼개서 으깨고 씹어서 읊조리며 먹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큐티가 있다. 성경 공부가 있다. 쉽지 않은 헬라어지만 그래도 분석해 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 분석과 말씀 누림
빵을 먹을 때 대강 그 성분을 알고 있다. 밀가루와 물과 닭걀 혹은 그 외 몇 가지 첨가물이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칼로리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분석이고, 꼭 필요하면 또 가능하면 할 수 있는 것이겠다. 나에게 있어서는 헬라어 원어를 보며 공부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 자신의 성분이지만, 주님은 단순히 밀가루만이 아니라서 그 안에 충만하심과 부요하심이 있다. 그래서 그 성분을 공부하고 싶어진다. 만약에 빵의 칼로리가 1000인데 그러한 열량이 내 삶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성분이 정확한지, 내가 제대로 삼켰는지, 내가 제대로 소화시켰는지 궁금해하는 것 처럼, 말씀을 읽을 때 궁금한 점들, 읽어도 내 삶 속에서 변화가 없는가 하는 점 등에 대해 분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분석보다는 말씀을 정말 씹고 맛보고 풍성히 누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빵의 성분을 분석만 하고 냄새만 맡고 정작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듯이 말씀도 분석 보다는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것이 ‘먹는’ 것이고 ‘씹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나의 일부가 되고 내가 된다. 생명이 되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생활하게 혹은 생명을 얻게) 된다.
주님, 머리로 알고 있는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 부딪히고 나에게 도전이 되고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시기 원합니다. 말씀을 먹고 씹고 온전히 소화해서 주님과 하나되며 성도들과 한 몸 되게 하소서.
주님께 와서 보고 그 안으로 믿을 때 경험하는 오병이어의 떡과 물고기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떡
30절 - 전 절에서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이 안으로 믿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무리의 반응은 '당신을 (그냥) 믿도록'을 질문한다. 물론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 어떤 사람 '안으로' 믿는다는 표현이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런 표현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헬라어 역시 그런 표현은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안으로'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무리의 사람들은 주님과 관계가 없는데 관심도 있고 구도자의 모습도 보이지만 아직은 '안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31절 - 그들이 단지 아무 직업도 없이 주님을 좇은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요즘 홈레스와 비슷해서 예전에 '거지'들은 정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요즘 노숙자들 중에는 한 때 정말 잘나가던 사람들도 있고,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 무리의 사람들은 '기록된 바'라고 시작하며 성경을 가지고 주님께 질문한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이 왜 '먹는 것'에 대한 것일까? 그것은 구약에서 큰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만나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도무지 믿기 힘들지만 매일 일어나던 기적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이며, 동시에 지도자 모세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근본문제인 먹을 것에 대한 표적을 지금 주님께 구하고 있다.
32절 -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아멘아멘으로 그대들에게 말하지만 모세가 그대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에게 하늘로부터 참된 빵을 주신다오." 주님의 초점은 '빵'이 아니라 '내 아버지'인데, 다시 한번 주님을 드러내고 계시다.
그런데 원어의 어순이 좀 이상하다. 보통 헬라어에서 '하늘로부터 참떡'이라고 하면 '떡 참 하늘로부터'로 쓰는데, 이 구절은 '떡 하늘로 부터 참'의 순으로 씌였다. 즉 '참 (진리, 실제)'라는 단어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떡을 가리키는 것인지 헷갈린다. 모든 번역에서 떡을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을 했고 그것이 맞는 것 같지만 뭔가 특별하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는 (이것이 맞는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주시나니 이것이 맞다 (참이다)'라고 들린다. 즉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참이다 라는 뜻같다. 사람들은 '내 아버지' 보다는 눈에 보이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더 좋아한다...
33절 - 그래서 '하나님의 떡'을 말씀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 '내려왔다'는 단어는 καταβαίνω라는 단어로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의 '내려온 자'와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35절에서 밝히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영원하신 생명 (조에)'을 주신다.
34절 - 체면보다는 솔직한 것이 좋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고 이 무리의 사람들도 그렇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떡을 소개하시자 곧바로 달라고 한다. 더우기 '항상' 달라고 한다. '항상'이라는 단어는 '더욱 더'라는 뜻도 된다. 아마도 앞에서 주님께서 보였던 오병이어의 기적의 경험을 가지고 그러한 기적이 '하나님의 떡'이라고 오해했나보다.
35절 - 그래서 주님은 밝히 말씀하신다. '그게 아닙니다 (오병이어에서 줬던 음식들이 하나님의 떡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말은 없지만 접속사 'de'라는 단어가 있어서 그런 뉘앙스가 풍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게 아니라) 내가 바로 (영원하신) 생명(조에)의 떡이오!!! 나에게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도 않고 내 안으로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36절-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주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영원히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 오고 주님을 믿으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37절 - 그러면서 주님은 희망의 선포를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다' 이 '올 것이다'는 'ἥκω 본문에서는 (헥세이)'라는 단어로 '도착하다, 이르다, 다다르다'의 뜻이 있다. 즉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모든 것들은 결국 주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38-39절 - 다시 한번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영원히 사는 문제에서 왜 '다시 살리는' 문제로 가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을 믿는다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다 (히 9:27). 이 말씀이 '휴거' 사건에는 어떻게 적용될른지 잘 모르지만 우선 모든 사람은 주님을 믿건 믿지 않건 육신의 죽음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15:53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라고 말씀한다.
40절 - 그래서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그 안으로 믿는 자마다' 영원하신 생명을 얻는 것이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이 '보고 믿는 자'를 살리신다. 즉 36절에 사람들이 '보고도 믿지'않았지만, '보고 그 안으로 믿는 자'에게 영원하신 생명을 주신다.
신약성경은 2천년 전 사건을 기록했다. 육신의 주님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교회를 통해서, 또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만난다. 주님은 우리에게 멀거나 숨겨진 분이 아니시다. 오늘 주를 보기 원한다.
주님,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믿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이르기 원합니다. 주님 안으로 믿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