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켓에서 음식을 사면 가끔 포장지에 ‘perishable’ 이라는 단어가 찍혀 있다. 즉 영구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음식이기 때문에 '유효기간이 지나면 상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perish라는 단어는 오늘 말씀의 ‘썩을 양식’의 ‘썩을’에 해당하는 단어다. 즉 ‘상하게 될 (제대로 된) 식사’이다. 한끼를 거뜬히 때울 수 있는 제대로 된 양식이지만 그 식품 자체는 언젠가는 상하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서 ‘멸망하다’의 단어가 원어로 동일한 단어 즉 ‘ἀπόλλυμι’ 아폴루미 이다. ‘아포’는 분리의 뜻을, 다른 부분의 어원인 ‘올레뜨로스’는 ‘파괴하다’의 뜻의 이 합성어는 ‘부수다, 쓸모없게 만들다, 끝내다, 망가뜨리다, 죽이다, 영원히 멸망당하다’ 등의 여러 뜻이 있는데, 음식이 상해서 못쓰게 되는 경우도 이 단어를 쓴다.
주님은 무리들에게 어디로 간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일어나자마자 바다 건너 주님께로 온 이들에게 ‘어이구, 바다 건너 오느라 수고했다. 반갑다. 너희들이 참 잘 쫓아 와서 나를 따라 주는구나’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멘 아멘’이라는 말씀으로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으로 말하지만 그대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만족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바로 27절은 ‘일하시오’ 라는 단어로 말씀을 시작한다. 이 단어는 ‘에르곤’이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가진 ‘ἐργάζομαι’ 에르가조마이 라는 단어인데, 일상 생활 전반의 모든 행위, 사업, 비즈니스, 일, 그리고 ‘운동’ 까지도 포함하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조차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무리들은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상하게 될 음식’을 얻기 위함이었다. 상할 음식을 추구하는 그러한 무리들 자신들도 언젠가는 상하게 (멸망하게) 된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게 되자 여러 방송에서 건강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봤자 언젠가는 perish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에르곤’ 혹은 ‘에르가조마이’는 결국 짧은 인생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경제활동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은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고 또한 인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이다.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로 질문을 한다. 그들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바로 그 이’ 안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일상은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비즈니스를 하던, 직장에서 일하던, 살림을 하던, 공부를 하던, Business as Mission, Study as Mission, Work as Mission, Homemaking as Mission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 안으로 믿는 것’으로 재정의 (redefine) 되어야 한다. 학생이 열심히 역사공부를 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신다면 주님께서 ‘넌 왜 성경 읽지 않고 역사책을 읽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 소위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너 왜 신학교 가지 않냐?’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사실 주님 오실 때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하고 있을 것은 일상생활의 ‘에르곤’이다.
눅 17:34-36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절은 없다고 나오지만 영어본 혹은 다른 사본에서는 ‘들에 두 남자가 있는데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라고 나온다.)’ 마 24:40-41 역시 같은 말씀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구절들을 굳이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러한 일상적인 행위들이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너무 복잡해진다. 잠자고, 들판 혹은 밭에서 일하고, 맷돌질로 식사 준비하는 일상의 활동들 가운데 어떤 이는 남고 다른 이는 데려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이 동시에 일어나려면 지구는 둥글어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시간대를 말하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한 시에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다.
주님, 우리가 무엇을 ‘함’이 아니라 먼저 주님 ‘안으로’ 믿을 때 우리의 모든 활동이 주 앞에 계수됨을 보았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공부하는 소위 ‘영적인’ 것들은 물론, 일을 하거나, 남을 도와주거나, 설겆이를 하거나 혹은 드라마 보면서 깔깔 거리고 웃는 것 조차도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욥이 그의 자녀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주님을 떠나 만족과 안식을 좇으려고 했다면 다시 돌아와 주님 안으로 들어오게 하소서. 나의 기질과 능력은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압니다. 주님의 구원하심이 나의 일상에도 미치게 하소서.
* 23절의 다른 보트들에 대한 언급은 현재 배가 한대 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몇 대가 더 와서 무리가 가버나움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