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예수님 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기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적은 기적일 뿐 표적이 될 수 없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분명 그 의미와 목적이 있는 표적이다.
오늘날 어떤 ‘기적’은 아닐지라도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기술로 몬산토 같은 기업은 여러 씨앗 품종을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병충해에 강한 품종들을 인위적으로 개발해 내어 어떻게 보면 기적같은 일들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원래부터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 통일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분에게 세상 임금 자리는 의미가 없다. 물론 시험하는 자 마귀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도 시험했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말씀하신 것은 부활 이후 승천 이전이셨지만, 주님은 이미 하늘과 땅의 주시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두고 바다로 내려갔다. 왜 일까? 더우기 주님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바다를 건넌다. 시간도 이상하다. 갈릴리 호수는 ‘θάλασσα’라는 단어를 써서 ‘바다’라고 했다. 바다라는 단어는 보통 지중해나 홍해를 말했지만 소금물도 아닌 갈릴리 호수도 ‘바다’로 많이 칭했었다. 그 크기가 꽤 컷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디베랴에서 가버나움까지 건너려면 시간도 꽤 걸릴 것을 알고 있었을텐데 왜 하필 밤에 건넜을까? 17절 말씀으로 보아 아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명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사실 제자들로서 그 무리들과 함께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억지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우매한 백성들이 주님이 그들을 피해 홀로 산으로 가신 사이 제자들을 장관들로 삼으려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늦은 시각이지만 빨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 어둔 시각에 그리 크지 않은 보트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아마도 8.3미터 길이에 2.3미터 폭 정도의 배) 를 타고 가는데 큰 바람으로 파도가 일어나면 정말 고생이다.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바람에 떠내려가면 안되기에 제자들은 노를 저어 약 4킬로미터 정도를 갔다. 이 정도의 거리를 바람을 맞으며 노를 젓는 것은 탈진하게 만드는 노동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속으로 두려움과 불평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 같다. ‘주님 말씀을 들었는데 이게 무슨 고생이람. 잘못하면 다 죽겠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허공을 가로 질러 걸어 오신다. 처음보는 광경이라 너무 무섭다. 이제 그들의 두려움은 풍랑이 아니라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두려움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만, 주님께 나아가면, 또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할 것은 나의 배 안으로 영접하는 일뿐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곧 기쁨으로 바뀐다. 이제 살았다. 그리고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가버나움이었지만 사실은 주님의 임재였다.
주님, 교회라는 배 안에 함께 탄 공동체의 식구들과 더불어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기 원합니다. 두려울 정도로 주님을 새롭게 만나기 원합니다. 그 두려움은 곧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주님께서 줄곧 함께 하셨음을 알게 하옵소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주님을 영접하게 하소서. 무엇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공동체의 목적지임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