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믿는 자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되는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눅 9:23으로 그 대상은 ‘무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기본적인 자아부인과 매일의 십자가 지는 삶을 살지 못하면 결코 무리에서 제자로 변함받지 못한다.

오늘 말씀이 그렇다. 2절에는 큰 무리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랐다고 했지만 26절에는 주님께서 밝히 말씀하기시길 그들의 따름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빵조가리 얻어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2절에는 표적 때문에 따랐겠지만 따르다 보니 공짜로 음식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따르는 목적이 음식이 되어 버렸다.  신앙이라는 것이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될 때 참으로 슬픈 현실이 된다.  물론 주님을 섬기는 주의 종들의 사례는 당연하고 그들이 누릴 권리이지만 신앙의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그들의 신 (god) 은 배 (stomach)가 되어 버린다. (빌 3:19)

빌립

큰 무리가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을 시험하여 주님은 질문하신다.  이 빌립은 분명 제자 빌립이지만, 사도행전 빌립 집사는 어떤 인물일까?  동명이인일까 아니면 동일인물일까?  이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우리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이해할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후에 집사밖에 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집사’의 직분을 우습게 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3천 명을 훨씬 넘었는데 집사는 겨우 일곱이었다.  즉 한 집사가 거의 500명의 성도를 섬긴 셈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형교회 담임목사 수준이다.  사실 일곱 집사를 세울 때 그들의 자격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행 6:5).  그 생각을 하면 현재 집사라고 불리는 내가 상당히 엄청 미안하고 뭔가 맞지 않는 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전도사'라는 것은 성경에 있지도 않고, 굳이 찾는 다면 '복음 전하는 자'이지만 그것은 순서상 '목사-교사' 앞에 있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아무튼 제자 빌립과 집사 빌립이 같은 인물이냐에 대해서는 정확히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오늘 제자인 빌립이 보여준 모습은 문제에 대한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또 오늘날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현상들이다.  예산을 세우고 기금을 마련해서 집행하고, 좀 더 괜찮은 모습의 사역이라면 거기에 대한 감사와 보고를 한다.  하지만 주님의 질문은 우리를 지금도 시험하시고 주님의 방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안드레

빌립이 있다면 안드레도 있다.  안드레가 한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은 믿음이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주님을 되려 시험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적어도 한 아이를 주님께로 데려왔다.  물론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는 질문으로 그의 믿음의 한계를 드러냈지만 빌립도 안드레도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다.  계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두의 발상을 뛰어넘는 일을 하신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참사를 겪으며 중국내 기독교는 사라진 것 같았다.  공산당은 영적 지도자들을 모두 투옥하거나 죽였고 그러면 교회는 분열되고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현재 중국교회 특히 지하교회의 인구는 1억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숫자적으로 그 어떤 국가의 기독교인 수보다 많을지 모른다. 

한 아이

안드레가 데려온 한 아이는 정말 나이가 어린 아이다.  이런 아이가 보리빵 다섯과 (조리된) 생선 두 마리를 가졌다.  어린 아이가 그 모두를 먹으려고 가져왔을리는 없고 아마도 그의 가족 모두가 있었지만 안드레에게 온 것은 이 어린 아이였다.  성경에서 보통 훌륭한 인물에 대해서는 이름을 기록하는데 또 한면으로 무언가 주님께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무언가 주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것은 이름없이 빛도 없이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자신이 바치는 무엇으로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큰 기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기쁜일인가.  후에 이 아이가 어떻게 됐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님과 교회를 평생 충성되게 섬기는 종이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 부활 때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기대가 된다.  ‘오, 네가 그 꼬마였구나!’ (물론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었겠지만)

큰 무리

2절부터 나오는 이 큰 무리에 대한 정체가 궁금해진다.  ‘한 아이’ 까지 있었으니 그 중 아이들과 여인들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성인 남자였을 것이다.  ‘오 천명’이라는 숫자는 남자만의 숫자였는데 6장 후반을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며칠을 주님을 따라 다닌다.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이들이 과연 이렇게 주님이 좋다고 며칠씩이나 따라다닐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26절을 보면 좀 이해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녹록지 않은 사람들 즉 요즘 말하면 태반이 홈레스 같은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주님을 따른다.  아, 이 사람만 따라다니면 적어도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되겠구나…  얘기를 들어보면 60년대 목사님들 중 많은 수가 끼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신학교 수학은 3개월에서 6개월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열악했다.  그러고 보니 후에 교회가 성장하고 자신의 학력에 대해 걱정이 생기고 그래서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학위를 산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학위는 찢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주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반면 생계 해결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군중’ 혹은 ‘민중’들이 있다.  나도 제자의 삶을 살기 보다는 이런 군중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많음을 본다…

오병이어

내가 주님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냥 빵과 생선을 가져다가 기도하고 사람들이 줄서게 하고 나눠줬을 것 같다.  ‘옛다, 갖다 먹어라’.  하지만 주님은 모두 앉게 하시고 제자들로 섬기도록 하셨다.  여기에서 ‘목적지향성’과 ‘관계지향성’의 모습을 본다.  교회는 ‘부흥’이 목표가 아니라 ‘잔치’가 목표다.  잔치가 있으면 부흥은 따라온다.  사실 부흥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행 2:47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하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구원을 통해서고 그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심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모일 때 집회는 먼저 주님을 위한 것이다.  내가 뭔가 배우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교훈을 얻고 영적 만족을 얻기 보다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만족을 위해 모이는 것이 첫째 목표다.  하지만 그러한 실행은 항상 자연히 우리로 만족을 얻게 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해지고 우리로 누림과 안식을 얻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소위 ‘대예배’에는 그러한 실제가 있는가?  모이는 사람들이 ‘와, 이건 정말 잔치군요!’라고 할만 한 것들이 있는가…

주님은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  찔끔찔끔 주신 것이 아니라 한번에 부어주신다.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 주신다.  그래서 그들은 배불렀다 (12절).  만족했다.

남은 것을 모아 열두 광주리를 거둠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남아있는 것을 그냥 버리거나 ‘to go’하셔도 될텐데 왜 굳이 다시 거두셨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거저 받은 것이라고 버리는 것은 죄다.  그래서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여러 교회들을 거치며 동일한 것을 목격한 것은 교회 물건들이 많은 부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어려운 헌금으로 마련한 많은 것들이 부서셔도 보수되지 않거나 창고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의 물품들 중에 남거나 모자라는 부품들을 서로 잘 교환하면 충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들도 부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고장나거나 부품이 모자라면 그냥 새로 구입한다.  그러면 고쳐쓸 수 있는 것들도 그냥 창고행이 되고 후에는 버려지고 만다.  주님은 명령하신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버리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이 말도 버린다는 말이네...).  예전에는 교회에 사찰집사가 있어서 이러한 것들이 비교적 적었지만 요즘은 버리는 일이 너무 쉬워졌다.  주님은 사람 보기에 버림 받을 것도, 버림 받을 만한 사람도 다시 고쳐 쓰신다.

주님, 오늘 짧은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군중과 제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저를 보여주셨고, 빌립과 안드레의 모습을 통해 나의 어떠함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무리를 측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또 남은 것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모으셔서 열 두 광주리까지 거두셨음을 봅니다.  내 삶 속에 버릴 것은 버려야 하지만 하찮게 여기는 시간이나 조그만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또 하나의 모습임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