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증언하시는 것 처럼 보인다.

주님은 자신을 증거하셔도 그 증거가 참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삼위의 첫째이신 아버지를 높이신다. 여호와 증인들은 14장 28절 말씀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는 구절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데 요한 복음에서는 그 구절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고 모든 구절에서 주님과 아버지는 동일하신 분이심을 말씀한다. 다만 삼위에서의 순서는 항상 아버지 아들 성령이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크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주님은 유일하게 '독생하신' 아들이시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주님이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셨음을 말씀한다.

그런데 이러한 증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위해 있다. 3장 17절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심판하시려면 굳이 아들이 오실 필요가 없다. 구약처럼 그냥 싹 쓸어버리시면 된다. 하지만 아들로서 친히 오셔서 증언하시는 이유는 사람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사랑은 그래서 인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 말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심판의 칼을 휘두르기 전 계속해서 '증언'해야 한다. '증언'이라는 말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정직해야 하고 그 내용이 좋은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μαρτυρέω'라는 것으로 영어의 '순교자'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증거의 결과는 순교다. 또 그 과정도 순교적 고통이다. 주님처럼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바로 증거다. 주님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또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증거의 삶이요 순교의 삶이다.

주님, 자신의 학력과 경험과 이력으로 증거하려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요. 배우려면 한참 멀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뭐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훨씬 더 많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에게 증거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능력의 창조주시지만 그러한 분이 힘없고 제한된 모습으로 오셔서 나를 부드럽게 설득하심을 봅니다. 주님 닮게 하소서. 특히 아비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참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힘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