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많은 얘기를 하셨던 주님, 이번 구절은 그를 오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유대인들에게도 역시 많은 말씀을 하신다. 이번에는 안타까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권위 있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심판과 사망보다는 영생과 생명,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죄 가운데 어차피 죽게 될 그들에게 '너희들은 싹 다 죽어야 마땅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 많은 말씀으로 증거 하신다.

창세기 3장 9절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신다. 이 구절은 받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리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 도대체 어디 있냐? 찾으면 혼내 주겠다!'라고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실리 없다. 그래서 그 질문은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다. 바로 오늘 구절이 그러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길게 말씀하는 주님의 심정을 말해준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맹세하실 때면 자신 보다 큰 이가 없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던 것 처럼, 주님도 당신 자신에 대한 증거를 하실 수 밖에 없다.

그 증거는 첫째로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 하시는 일을 보고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즉 주님은 유일하게 아버지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분이시다.

둘째로 그 하시는 일중에 가장 큰 일이 바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죽은 자를 살리긴 했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영원히 살리는 부활의 주체이시고 한 사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나사로의 사건은 아마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신 사건이지 나사로의 궁극적인 부활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마 27:53에는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는 기록도 있다.)

셋째로 아버지는 이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신다. 후에 말씀하지만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하는 모세요 그들 자신이다. 하지만 심판의 권한을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여하셨다.

넷째로 주님은 아버지로 부터 보내심을 받았고 영생과 부활의 주체이시다. 24절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말을 듣고 주님을 보내신 이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데, 여기서 '믿으면'의 전치사는 eis가 아니라 to이다. 계속해서 주님 '안으로' 믿지만 여기서는 보내신 이를 '향해' 믿는데, 아버지 '안으로'는 주님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먼저 주님 '안으로' 믿어야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 주님 만이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일이나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서 살아나는' 것 모두 28절 말씀처럼 '무덤 속에 있는 자' 즉 육신적인 죽음은 물론이지만 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몰라서 죽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부활의 때에 주님은 살리시는 분이시다.

다섯째로 주님은 '선'의 주체이시다. '선'의 개념은 호불호 혹은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선'이라는 단어는 '아가또스 (본문에서는 아가따)' 라는 단어로 신약 여러 곳에서 긍정적이고 크리스천 삶에서 아름답고 받으실만한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라고 한 것은 율법적인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서의 선은 악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고 호불호에 대한 것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개념이다.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한 주님을 믿는 것,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께 선한 일이다.

주님, 주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요. 모함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어 온전한 선함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고 아들 안으로 믿음으로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음을 압니다. 이 생명이 풍성해야 하겠습니다. 내 힘과 능력과 '훈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은혜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