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는데 양의 문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할 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만들었다 느 3:1, 가축들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고 통과세를 내지 않는 문. - 인터넷에서) 곁에 못이 있다.  ‘못’은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고 아마도 지금 국제규격 정도 혹은 그 보다 조금 작은 수영장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못의 이름은 베데스다인데 히브리 혹은 아람말로 베뜨 헤스다 즉 은혜 혹은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고 동시에 아주 정 반대되는 ‘수치’ 혹은 ‘부끄러움’ 등의 뜻도 있다.  그 이유는 3절 내용처럼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고 구약에서는 병들은 것이 죄의 결과로 생각되어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나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위키에서 발췌).

그런 못 주위로 행각 다섯이 있다.  행각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원두막 같은 것인데 지붕을 덮어서 지중해 지역의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사람들이 쉴 수 있게 만든 단식 건물이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표적’ 혹은 ‘신호’를 중시하는 요한 복음에서 그냥 ‘행각 몇 개가 있었다’ 하지 않고 그 숫자를 확실히 한 것 보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데, 보통 성경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는 피조물 넷과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를 합한 것으로 은혜와 긍휼을 뜻한다.  이것은 구약적인 개념으로 신약에서는 완전수 일곱 즉 피조물의 4와 삼위 하나님 3을 더한 것이 된다.  삼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셋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인데 논리적으로는 쉬운 얘기가 아니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경험하고 깨달을 때는 성령-아들-아버지 순서로 알아가게 된다.

아무튼 이 베데스다 못은 특별한 기능이 있었는데 병자들이 누워 기다리다 물이 동할 때 누구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나음을 받았다.  천사가 물을 동한다고 했는데, 아무때나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가 있다.

그 중에 38년 동안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이 일부러 그곳에 들러 그를 보시고 그 병이 오랜 줄 아시고 물으신다.  ‘그대가 낫기를 원하시오?’

이 질문에 보통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만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가고 싶지만 다른 사람 도움이 없이는 못가서 내가 가려고 할 때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내려갑니다’ 라고 변명한다.  이러한 변명에 주님은 꾸짖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상황을 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황도 보시고 꾸짖기도 하시고 온전히 은혜를 베풀기도 하신다.  여기 ‘병자’라고 쓴 단어는 ἀσθενέω로 ‘아프다’ 혹은 ‘무기력’ 즉 힘없다 라는 뜻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변명을 하면 게으른 것이지만 주님은 이 병자가 정말로 힘이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우리는 모두 힘없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천사가 물을 동하는 정해진 때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대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시오’ 그 말씀이 무기력한 이에게 힘과 에너지가 되었다.

고등학교 어느 여름 날 너무 덥고 짜증나고 힘들어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말씀해 주소서.  나를 살려 주소서.  그리고 성경을 폈는데 그 때 그 말씀은 나를 망치같이 강타했고 나의 온 몸은 전율하고 마치 전기가 흐르듯 내 머리와 발끝 밖으로까지 힘과 에너지가 흘러 넘치는 것을 느꼈다.  물론 미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의 경험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강력이었다.  아무 희망도 찾을 수 없던 때 나에게 구원의 경험이 있었다.

주님께서 이 무기력한 사람을 고친 때는 구약을 대표하는 안식일, 그리고 천사가 동하지도 않는 제대로된 ‘카이로’가 아닌 때였다.  고후 6:2은 말씀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제 믿는 자에게는 바로 지금이 은혜와 긍휼과 구원의 때이다.

주님, 구약에서도 성막과 성전을 통해 먼저 인간사에 개입하시고 오셔서 임마누엘 하셨지만, 이제 신약에는 아예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 치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셨음을 찬양합니다 (요일 1:1).  무기력하고 아무 희망도 없던 나에게 삶의 의미가 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구원의 날이오니 주님 구원하시옵소서.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함을 주 앞에 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의 종들을 보내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