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 여자는 다시 마을로 들어가고 복음을 전했고, 제자들은 마을로 들어가서 음식을 사서 나왔지만 그들은 마을과는 상관이 없었다.  랍비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정작 주님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모른다.

32절 –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신다.  8절에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들어갔는데 이 단어와 ‘양식’은 다른 단어다.  아마도 ‘양식’이 음식이라면 ‘먹을 것’은 단순히 끼니를 떼울 만한 간식거리의 뜻인 것 같다.  제자들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 여행 중에 구할 수 있는 끼니를 떼울 만한 그 어떤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제대로된 식사가 있다고 말씀한다.  이 ‘양식’의 어원은 ‘소, 황소’의 뜻이 있기 때문에 킹제임스 번역에서는 ‘meat 고기’로 번역한 곳이 많다.  즉 제대로 된 식사다.

33절 –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무색해진다.  자신들이 고생해서 끼니를 떼울 것을 찾아 왔건만 주님은 내게는 진짜 제대로 된 음식이 있다고 하신다.  마을에서 벗어난 우물가에서 그런 식사가 어디서 났는지 궁금해 한다.

34절 – 주님은 진짜 양식을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진짜 양식이다.  양식을 먹으면 힘이 생긴다.  생명을 얻는다.  그 힘과 생명으로 산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면 내 안에 기쁨과 보람과 감사가 넘쳐 그 힘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보내신’이라는 단어는 38절 제자들을 ‘보내었’다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다.  38절의 보내심은 ‘파송 (사도와 같은 단어)’ 즉 특별한 임무를 맡겨 어떤 지역으로 보낸다는 뜻이고, 여기의 보냄은 그냥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았다.  단어를 다시 자세히 보니 ‘파송’의 ἀποστέλλω 은 두 부분인데 첫 부분의 ‘아포’는 ‘분리’를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해가 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낼 때 분리되지 않고 함께 오신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전체에서 주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것을 계속 밝히신다.  물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이 여럿 있고 그 중에는 ‘아포스텔로’도 쓰였다.  5:36에서는 ‘파송’을, 바로 뒤 37절에서는 위의 단어인 ‘펨포’를 썼다.  아포스텔로는 사명을, 펨포는 특히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되지 않는 보내심을 말씀하는 것 같다.

35절 – 농사를 잘 모르지만 보통 밀은 씨뿌린 후에 4-5달이면 추수할 수 있을만큼 자라는 것으로 안다.  씨를 뿌리자마자 수확을 바라는 것은 도둑심보지만 주님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빨리 수확의 때가 왔음을 말씀하신다.  그것을 보려면 눈을 들어 밭을 보아야 한다.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길바닥만 보고 산다면 추수의 때를 모른다.  하지만 눈을 밭으로 돌리면 벼나 밀이 무르익은 것을 보게된다.  사마리아 경우가 그렇다.  이질적인 지역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사마리아 지역도 희어지게 준비시켜 주셨다.  선교지가 이렇지 않을까?  들려오는 뉴스나 주위 풍경은 주님을 배척하는 것 같아도 라디오 방송이나 그 외 여러 보이지 않는 손길의 수고로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된 지역이 많다.

36절 – 이 ‘거둔다’라는 단어의 어원은 ‘여름’이다.  그래서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여름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국은 가을에 추수하지만 아마도 지중해 지역은 여름에 추수를 하나보다.   원어에는 ‘이미’라는 단어가 없다.  ‘베는 (추수하는) 자는 삯을 받는다 그리고 영생안으로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 

심는 자는 누구고 거두는 자는 누구이며 그 삯은 무엇일까?  마 15:13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라고 하며 아버지께서 심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고전 3:6에서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라고 하며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만, 그 씨 뿌리는 사역을 여러 사역자에게 위임하셨다는 뜻이다.  특히 뒤 구절에는 아마도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삯’이라는 단어는 우리말 번역에서 ‘상’으로 많이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하늘의 상’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대게 자신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전 9:18에서 독특한 언급을 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주님은 거두는 자 (베는 자, 추수하는 자)는 삯을 받는다고 하셨다.  즉 거두는 일 자체가 영광이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분에 넘치는 사역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상이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자신이 써도 무방한)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모두 사도 바울처럼 자비량 목회자나 선교사일 수는 없지만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하는 목적과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37절 – ‘한 사람’ 즉 단수이지만 뒤 38절에서는 ‘사람들’ 즉 복수이기 때문에 심고 거두는 이가 한 명은 아니다.  이 말씀은 내가 고생하여 심은 사역을 해도 그 열매를 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열심히 고생해서 목회해서 ‘성공’했으면 그 ‘열매’를 따 먹어야 하겠다는 보상심리가 있어도 받을 만한 만큼 이상의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열매가 빨리 익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심었다고 내가 거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도해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을 때 나의 고생과 능력과 설득력으로만 그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여러 모로 그들에게 '심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고 환경과 상황이 함께 했다.

38절 – ‘노력’이라는 말은 ‘고생’이라는 단어다.  씨 뿌리는 것이 쉬워 보여도 고생과 고난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과 침례자 요한이 준비해 놓은 것을 제자들은 거두어야 하는데, 이 거두는 것 역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고 해서 그냥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이 들리지만, 원어에서는 ‘너희들은 그들의 고역 안으로 들어왔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36절 말씀처럼 심는 자와 거두는 자 모두 고생은 하지만 열매를 거두는 것은 기쁜 것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39절  - 한 여자의 아주 단순한 증언으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안으로 믿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말한’ 것이 무당이 하는 말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무당은 무당의 유치한 말을 하는 반면 여자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그의 내면 깊은 곳,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 즉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하는 영적 갈망의 문제였다.  여자의 그러한 문제가 만져지고 다뤄질 때 그녀는 증언할 수 있었다.

40절 – 주님께서 사마리아인들과 이틀을 유하시는 동안 많은 말씀을 하셨을텐데 거기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매우 기본적인 말씀을 하셨거나 전에 이미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하셨을 수 있다.  제자들은 함께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마리아인들로 둘러싸인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주님의 또 다른 모습, 사마리아에게 까지 복음을 전하시는 인자한 모습에 감사하고 있었을까?  나같으면 좀 불편해서 빨리 가자고 했을텐데..

41절 – 여기 ‘예수의 말씀’에서 말씀은 ‘로고스’이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의 의미가 있고 레마는 ‘즉각적으로 지금 말하는 것’으로 쓰였지만 여기의 말씀은 로고스인데, 로고스의 뜻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가르침’ ‘교리’ 등의 뜻이 있다.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그들의 교리조차 미신적인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들을 사마리아인들에게 기대하실 수 없었기에 그들에 맞추어 복음을 전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말씀을 전하는 대상에 따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전해야 한다.

42절 – 이 구절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물론 ‘직접 듣고 체험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지만, 그것은 모든 믿는 이들이 제사장이며 기름부음이 각 믿는 이들에게 있기 때문에 (요일 2:20, 27) 처음 믿을 때는 목회자나 믿음의 선배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목회자나 교주 등에게 무작정 맡기는 것에 대한 경고로 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를 중매하는 것임을 알았다 (고후 11:2).  그래서 자신이 배척받아도 기뻐할 수 있었다.

주님, 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음을 봅니다.  심던 거두던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것임을 또한 봅니다.  나 혼자 내 영광과 즐거움을 위해서 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주님을 섬기며 함께 사역하게 하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주님 뜻 아니면 멈추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성숙한 신앙 갖추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