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 – 바리새인들은 침례자 요한에 이어 새롭게 부상하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주님도 아셨다.
2절 – 소문은 주님께서 직접 침례를 베풀었다고 돌았지만 사실은 제자들이 베풀었다. 그런데 침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왜 주님께서 직접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도록 하셨을까? 과연 주님을 따라다닌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었을까?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라서 그랬을까?
그런데 그 이유는 ‘침례’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침례는 죽은 이를 장사하는 것이다. 시체를 땅파고 묻는 것을 의미한다. 땅을 파고 묻는 것이 특별한 사람들의 일일까? 아니다. 땅을 파고 주검을 묻을 줄 아는 사람이면 모두 다 할 수 있는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특히 장사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이다.
주님은 물론 바울 역시 친히 침례를 한 것은 스데바나 집 사람 외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고전 1:13-17). 주님이나 바울이나 침례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막 1:38, 고전 1:17). 침례는 믿는 이들이면 그 누구도 다 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로 모여 목회자의 인도로 많은 이들 앞에서 선포하며 간증하며 침례를 받는 것이 좋지만,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 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길을 가다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침례다.
3절 – 바리새인들이 주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주께서 듣자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신다. 한국어 번역에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원어에서는 ‘주께서 들으셨을 때… …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로 가셨다’ 라고 되어 있다. 주님은 복음 전하는 것이 침례자 요한과 또 침례 사역의 문제로 막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의 사마리아 – 북한 그리고 일본
4절 –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은 그 지역이 위치적으로 유대와 갈릴리 중간에 있기 때문에 거리상 빠른 길은 맞지만 정서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앙금이 있던 사이라 보통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여기의 ‘하겠는지라’의 원어 δεῖ 는 ‘필요하다, 맞다, 합당하다, 마땅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주님은 길이 빠르다고 택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거쳐가야 하실 필요가 있었다.
5절 – 사마리아는 이질적으로 변했지만 원래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있는 곳이다. 창 48:22에는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라고 하며 요셉에게 땅 한 덩이를 추가로 더 준다. 야곱의 이야기는 벌써 1500년이 지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몇 세기 전 잃어버린 고토이며 특히 영적으로 회복해야할 땅이 사마리아이다. 그러고보니 북한과 일본이 생각난다. 믿을 수 없는 북한이고 얄밉기만 한 일본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북쪽도 그렇고 남쪽 일본 역시 한민족이 회복해야 할 땅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영적으로 그러하다. 올해는 일본으로 단기선교를 놓고 기도해 본다.
6-8절 – 세겜 땅만 가까운 것이 아니라 거기 야곱의 우물도 있다. 일본 여러 곳에 구다라 (백제)의 자취가 남아있다. 특히 남부 규슈 지역 두루두루 그러하다.
요한 복음의 시간 문제
주님은 여행에 지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그런데 여기 시간이 문제다. 요한복음은 소위 공관복음과는 달리 시간적으로도 제일 나중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 대신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그렇지만, 시간도 히브리식 시간이 아닌 로마식 시간을 썼다고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 마 27:44, 45에는 주님께서 여섯 시 (유대 시간으로 정오)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요 19:14, 15에는 빌라도 앞에 서 있다. 유대 시간은 오전 6시 부터 시작이고, 로마 시간은 현재와 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공관 복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정오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썼지만 요한복음은 로마시간 6시 즉 이른 아침 6시 혹은 저녁 6시 정도에 빌라도 앞에 서신 것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우물가에 앉으신 것 역시 생명의 삶 해석과는 다르게 로마시간으로는 저녁 6시 정도일 수 있다. 많은 해석에서 개인사가 복잡했던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햇빛이 내리쬐는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하는데 요한 복음 내에서 시간을 혼용하지 않았다면 이 때는 아마도 주님께서 이미 많이 걸어서 쉬고 싶으셨던 오후 6시 쯤이 아닌가 한다. 특히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마도 저녁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사람의 갈증과 하나님의 갈증
보통은 제자들이 주님께 물을 얻어 드렸겠지만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갔기 때문에 친히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며 그에게 은혜와 긍휼의 손을 펼치신다. 사역을 하다보면 다른 이들이 해야하는 것을 내가 떠넘겨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때가 또 다른 섬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더우기 한 영혼을 구하는 귀한 사역의 장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육신의 갈증이 있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갈증을 말씀하고 계신다.
9절 –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그리고 ‘여자’에게 뭔가 달라고 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종교적 생활이 강했던 반면 사마리아 지역은 그러한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업신여겼고 특히 이성과의 접촉은 불결한 것이었다. 아마도 성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은 문란했던 것 같다.
10절 – 주님은 또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신다. ‘아, 그게 아니고… 내가 좀 목이 말라서 그럽니다. 그냥 좀 주면 안될까요?’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내게 물 좀 주시오’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했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생명수를 줬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한다. 선문답 같지만 그 여인에게는 정말 필요한 말씀이고 그 여인의 마음 속 깊은 문제를 만지고 끌어내는 질문이다. 여인의 당돌한 질문에 주님은 ‘하나님’ ‘선물' ‘생명수’ 등의 말씀을 하신다. 전도를 하다보면 대화에 끌려갈 때가 있고 대화를 주도할 때가 있는데 주님은 대화를 주도하신다. 하나님의 갈증은 주고 싶어하시는 갈증이다.
11절 – 여자가 관심을 드러낸다. 이제껏 경험으로는 우물도 깊어 자신도 물을 긷기 힘든데, 처음 본 유대 남자가 권위있는, 그러나 부드러운 말투로 그에게 예를 갖춰 말하는 것을 보고 ‘니들 유대 것들’이라는 마음 속의 앙금으로부터 ‘주여’라는 태도로 바뀐다.
12절 – 사마리아인들도 야곱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줄기인 우물이 가치있었고 역사적으로 그 우물에 의지해서 살아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살아있는 물’에 대해 말씀하니 궁금해진다. 헬라어로 씌였지만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아마도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했을텐데 ‘생수’를 뭐라고 하셨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반응했을까 궁금하다. 솟구치는 물? 살아있다.. 흠..
갈증
13절 - ‘이 물로 부터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게 된다. 계속 마시다가 나중에는 죽는다.
14절 – 사람은 목말라 한다. 인정받기에 목마르고 칭찬받기에 목마르고 보람되고 의미있는 것을 얻기에 목마르고, 아니면 쾌락을 얻기에 목마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내면의 갈증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갈증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이 주실 물로 부터 마시는 자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그 사람 속에서 영생 안으로 솟구치는 샘물이 된다.
15절 – 여자는 엉뚱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육적인 것으로 받고 이해한다.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신다.
16절 – 당신 남편을 불러오시오. 주님은 이 여인과 더 깊은 교제를 하고 싶어했지만 그 여인의 상태는 먼저 주님 앞에 폭로되어야 한다. 내 안의 숨긴 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갈 수 없다.
17절 –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주님은 폭로하시면서도 그 여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하신다. 꾸짖거나 수치심이 들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부드럽게 그 여인, 특히 유대인들에게 업신받는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신다.
18절 –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법적으로 남편도 아님을 말씀하신다. 이 구절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요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당시 풍습과 문화의 피해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혹은 사마리아 지역 자체의 성적 문란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여인의 삶은 많은 면에서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남편들을 갈아 치웠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인생임을 보여준다. 내가 의지하던 것이 기대에 어긋나자 다른 것으로 갈아탔지만 그것도 역시 내게 만족을 주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나.. 다섯 가지 어떤 것을 갈아치우거나 혹은 내가 ‘짤리거나’ 혹은 거절당하고 이제 새로운 것을 만나 좀 희망을 가지려고 했지만 이번 것은 법적으로도 나를 지켜줄 수 없는 어떠한 것이다..
19절 – 여자는 주님을 조금 더 깊이 알아간다. 단지 유대인 남자에서 이제는 선지자로 이해한다.
예배의 문제
20절 – 자신의 상황에 대해 회개를 한 것 같지 않지만 이 여인의 질문에는 그가 삶 속에서 항상 궁금하고 갈등해 오던 문제가 ‘예배’의 문제였음을 드러낸다. 회개는 울고불고 짜는게 아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입김으로 지음받았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그를 예배하고 싶은 갈망은 마음 속 깊숙히 존재한다. 이 여인은 합당한 예배에 대해 질문한다. 예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 여자의 삶에는 만족이 없었다. 그렇기에 혹시 유대인의 예배가 맞고 자신들이 에배하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닌지 주님께 여쭤본다.
21절 – “부인이여, 나를 믿으세요. 이 산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니고 당신들이 아버지께 예배하게 될 때가 오고 있습니다.” ‘여자여’라는 단어는 2장에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단어다.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에게나 천시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나 차이를 두지 않고 ‘부인’이라는 말로 존칭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기대하던 대답은 둘 중 하나였겠지만 주님은 둘 다 틀렸다고 하신다. ‘이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엎드리는 것이 아니다.
22절 – “당신들은 당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엎드리고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 엎드리는데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예배는 미신적이었다. 특히 성전이 있음에도 따로 산에서 예배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지시해 주셨다.
그러나!
23절 – “그러나!!” 원어에는 ‘그러나’가 있다. 이 때까지는 성전을 위주로 예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배가 맞았지만 이제는 ‘그러나’이다. 때가 오는데 바로 지금이다! ‘참된 예배자들은 영과 참됨 안에서 아버지께 엎드리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엎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자들’의 ‘참된’과 ‘진리’로 번역한 ‘참됨’은 같은 단어이다 (하나는 부사형, 하나는 명사형). 이 ‘참됨’은 ‘실제’ 즉 본질과 영적 실제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고 ‘영’ 자체가 실제임을 말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 그 본질이다.
24절 –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자들 (엎드리는 이들)은 반드시 영과 참됨 안에서 엎드려야 한다.
25절 – 사람이 그리 빨리 변하지는 못한다. 주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선포를 하셨음에도 여인은 잘 깨닫지 못하고, ‘네, 좋은 말씀인 것 같지만 잘 이해는 안되네요. 하지만 메시야라고 하는 분이 오신다고 했으니 그가 오시면 뭐든 알려 주시겠죠.’라고 말한다.
26절 – 그러자 주님은 밝히 말씀하신다. ‘바로 내가 그 메시야입니다.’ 흠... 주님께서 그 어느 때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밝히셨던 적이 있으셨나? 아마도 사마리아 땅은 주님의 전도 여행 중 이번이 처음이요 마지막이 될 것이라 그러셨을지도.. 아무튼 이 여인 수지 맞았다. 그리고 사마리아 수지 맞았다.
27절 – 유대 전통으로 주님께서 여자와 단독으로 대화하셨던 일은 없으셨지만 이러한 일에 대해 제자들은 묻지 않았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시면 나의 것은 버린다
28절 – 주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버려두고 혹은 버리고’의 일이 많다. 왜 그럴까? 더 귀한 것, 더 좋은 것, 아니 제일 중요한 것을 얻었고 만났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을 만나자 마자 전도한다. 소위 ‘전도 훈련’ ‘제자 훈련’ ‘성경 공부’를 하지 않고 바로 즉시 주님을 마을에 소개한다. 그 후에는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29절 – 전도가 힘든 것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즉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이고 나의 깊은 갈망이 만져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도 훈련으로 ‘주님 믿으면 좋~~습니다’라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만나면 전도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과의 만남은 한번으로 끝나면 안된다.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는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까지 해도 되지만 후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30절 – 한 여자 특히 녹록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한 사람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주님께 나왔다. 가끔 간증을 들어보면 평범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몇 만 명을 전도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 여인 같은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기도 한다. 누가 했건 주님께 오면 된다.
주님, 3일치 큐티를 한번에 하려니 힘드네요. 요한 복음의 이 풍성한 말씀을 하나 하나 모두 기억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께서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삶 살게 하소서. 나의 방법, 전통, 논리에 맞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갈증을 해소해 드리는 영과 참됨 안에서 무릎 꿇고 몸을 숙이는 예배하게 하소서. 내가 낮아질 때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이 높아지심을 압니다. 내가 높아질 이유가 없음을 다시 보게 하시고 오직 한 영혼을 주께 돌아오도록 쓰임받는 영광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