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제자 요한은 같은 이름의 침례자인 요한에 대해 양면적인 모습을 그린다. 29절에는 침례자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지만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고 바로 옆에서 계속 함께 침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 대해 24절에는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하며 '아직까지도' 라는 투의 말로 그를 고발한다. 침례자 요한의 사역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평탄케 함으로 주님께서 사역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에서 끝나야 한다. 계속해서 같은 무대에 두 명의 주인공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과 혹은 교회 내에서, 입으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주님께 자신의 왕좌를 내드리지 않음을 본다. '나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끝나지 않으면, 내가 내려 놓지 않으면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실 수 없다. '헌신'이라는 말은 '내'가 뭐든 주님을 위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끝내고 주님의 어떠함과 그의 계획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결정해서 찬양사역하고 구제사역하는 등 그러한 선택권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역들은 아직도 내가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나중에는 '오실 이가 당신이십니까?'라는 의심이 들게 만든다. 모든 면에서 죽고 부활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관제로 부어졌다고 말한다 (딤후 4:6). '관제'라는 말을 개정에는 '전제'로 바꿨는데 사실 구약을 보니 모두 '전제'라고 되어있다. '관'은 '부을 관'이고 '전'은 '법 전'자이다. 의미를 보면 '관제'가 더 맞는 것 같지만 '붓다'는 의미보다는 '술 혹은 액체'의 뜻이 더 강한 영어로는 drink offering이기 때문에 아마도 전제라고 한 것 같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자신을 관제 혹은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했는데 (빌 2:17, 18) 이것은 관제로 부어지는 것이 인간적인 면에서는 기뻐할 일이 아님을 상대적으로 말한다. 아마도 순교를 의미했을 수도 있다. 관제는 술 혹은 피 등을 쏟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술을 부어 드렸고, 피는 지성소에서 제단과 주위에 뿌렸다. 그런데 '피'는 관제가 될 수 없다. 왜냐면 drink offering이고 피는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순교를 의미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피'를 드린다고 해석한다면 매우 이단적인 해석이 된다. 우리의 죄를 사하는 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유일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헌신은 자신의 피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2장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주님의 표적처럼 우리 삶 속에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주님의 어떠함을 통해 그러한 누림의 삶을 온전히 쏟아 붇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실 관제 혹은 전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체험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할 수 있는 (마 26:8) 사람만이 가능하다. 내가 부으려면 내 안에 차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온전하고 깨끗하고 살아있는 포도주가 아니면 드릴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그러한 것은 오직 주님만이 내 안에서 변화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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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 예식

아주 흥미로운 언급인데, καθαρισμός라는 말로 구약의 여러 정결 의식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이유는 '물'에 있다. 구약에서 많은 정결의식이 '물'로 이루어지는데, 아마도 유대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의 변론 뒤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한다. baptize (원어: βαπτίζω)는 우리 말로 '세례'라고 번역이 많이 되었는데 '세'라는 말이 '씻다'는 말이기에 세례가 죄를 씻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원어 '밥티조'라는 말은 완전히 물에 빠지는 '침'의 뜻이다.

신약에 물이 '씻는' 개념으로 나오는 구절은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등 인데, 위의 구절에서 물이 '죄를 씻는'다는 의미는 없다. 다만 우리 몸을 깨끗이 함, 즉 우리의 허물과 행위를 씻는 것이고 이것은 주님의 말씀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엡 5:26의 물은 말씀 안에서의 물이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침례를 받음으로 완전히 끝나 장사되고 '위로부터' 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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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 -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말하고 있는데, 그 영을 하나님께서 무한정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이 어떠한 것을 말씀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무한정 주고 계시는 영으로 레마를 말씀하신다. 즉 항상 하나님과 붙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신다. 이것이 참된 사역이다.

35, 36절 - 한국어에는 라틴계 언어에 있는 정관사 (the)가 없어서 그냥 '아들'이라고 했지만 원래는 the Son 즉 굳이 번역하자면 그 아들이다. 딸만 낳다고 구원 못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야 영생이 있고, 그 아들에게 자신을 설득당하도록 하지 못하는 자는 생명을 볼 수 없다.

주님,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를 드린다해도 하나님은 나같은 죄인에게는 가치를 발견하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나에게는 사망선고가 어울리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함을 인정합니다. 그 아들을 인정함이, 그 아들을 앎이 영생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