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목을 뭐라고 정할까 하다가 16절 그 유명한 구절에서 갑자기 ‘주셨다’는 말씀에 은혜가 왈칵 쏟아졌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독생하신 외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주셨다.  평생 감사의 눈물로 감동해야할 제목이다.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주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니고데모 보다는 주님께서 더 말씀을 많이 하신다는 거다.  주님은 정말 니고데모를 사랑하셨나보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말이 많이 필요없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마치 자식을 대하는 아비처럼 친절히 말씀하며 설명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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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지 못합니까?  아멘 아멘으로 말하는데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고 있지 않죠.  내가 만약에 땅의 것을 당신들에게 말해도 믿지 않고 있을 텐데 하물며 하늘의 것을 당신들에게 말한다고 믿게 될까요?  하늘로 부터 내려온 자, 즉 하늘 안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 안으로 오른 자가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이는 그 안으로 믿는 각 사람마다 멸망당하지 (잃어 버리지, 부숴지지) 않고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상을 이처럼 (후토스) 아가페 하셔서 독생하신 그의 아들을 주셨는데 이는 그 안으로 믿는 각 사람 마다 멸망 당하지 않고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 분의 아들을 세상 안으로 파송 (‘사도’와 같은 단어)하신 것은 그 세상을 심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해 구원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안으로 믿는 사람은 심판받고 있지 않는 것이지만 믿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안으로 믿지 않았기에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심판 (한국어도 영어도 정죄라고 되어있지만 원어는 심판) 이라고 하는 이유는 '빛'이 세상 안으로 왔는데 사람들은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아가페 (아주 좋아, 즐겨, 만족해) 했고 이는 그들의 행위가 고약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의미없고 나쁜) 일을 행하는 각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있고 '빛'을 향해 오지 않는데 그의 행위가 탄로 나지 않을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것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향해 오는데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열심히 되어진 것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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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니고데모의 한 마디 질문에 주님은 엄청 길게 설명하신다.  주님은 정말 니고데모를 사랑하셨나보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에 질문 하나를 했는데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 같다.  우리 자녀들에게 사랑이 풍성한 마음으로 삶을 가르치며 말씀을 나누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13절 – 주님 외에는 하늘로 오른 자가 없다.  이것은 소위 ‘들림 받은’ 에녹이나 엘리야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아마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늘은 하나님 우편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물론 에녹이 ‘들림 받았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주님께서 데려가시니 더 이상 땅에 없다’ 정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들림 받은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주님은 지금 땅에 있지만 동시에 '하늘 안에' 계신 분이시다.  주님의 임재는 하늘을 가져오신다.

14절 – 인간은 타락 후에 근본적으로 독사의 자식들로서 뱀의 모양과 독을 서로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쳐다보는 사람은 살도록 하셨다.  구리뱀은 뱀의 모양은 있지만 뱀의 독과 기질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죄가 없으시다 (히 4:15).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나무에 높이 올려지셨고 누구든 그를 보고 그 안으로 믿으면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16절 –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주신 것을 감사히 받고 누리면 된다.  그 방법은 이해할 수 없으나 다만 주신 것을 받으면 된다.  받는 것은 믿는 것이요 믿는 것은 받는 것이 된다.

17절 -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지시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도 서로 따지기 이전에 서로가 구원이 필요한 자들임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19절 – 심판 (정죄)라는 단어는 κρίνω 라는 단어로 ‘나누다, 구별하다, 걸러내다, 선택하다, 인정하다, 결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따지다 등의 많은 의미가 있다.  ‘정죄’라는 단어는 이 단어에 ‘kata’를 붙여서 ‘밑으로’라는 뜻을 첨가한다.

20절 - 여기의 ‘악’은 신약에 4번 나오는 단어로 영어의 foul  즉 야구의 파울볼 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21절 – 우리의 행위가 진리를 따르는 참된 것이 되려면 그냥 ‘착한 일’로서는 부족하다.  ‘하나님 안’이 필요하다.  하나님 안이라는 지경과 기준이 선함과 악함을 구분 짓는다.

주님, 주님은 그 오랜 우주의 시작 전부터 이미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정하시고 그 기쁘심을 따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계획 안에 주님 자신의 죽으심도 포함시키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논리도 하나님을 비판하고 따진다 해도 주님 자신의 죽으심까지 포함시키신 그 사랑과 반전은 우리로 입을 닫게 합니다.  영원히 높임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