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으로부터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나다나엘. 나도 그렇게 인정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주님으로부터의 인정은 드러나는 일을 했을 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는 것에 대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 주님은 인정하신다. 골방에서 한 것을 주님이 기억하신다. 오른 손이 하고 왼 손이 모른 것에 대해 주님은 기억하신다.
돌 항아리 여섯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주님께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이기도 하고 그 내용이 특이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보통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에 조명을 하지만 오늘 돌 항아리 여섯에 눈길이 간다. 돌 항아리 여섯은 원래 포도주를 위한 항아리가 아니라 ‘유대인의 정결 예식’ 즉 오는 사람들마다 물을 떠서 손이나 발을 깨끗이 씻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인들이 물을 길어 넣을 때는 별 생각없이 그냥 물을 넣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주님은 포도주 통에 물을 길어 넣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위생상 손발을 씻는 물 통에 물을 넣고 거기서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을까?
1절 – ‘사흘 째 되던 날’ – 앞 1장에는 ‘이튿날’이라는 말이 3번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나흘 째 되는 날이겠지만, 원어로 보면 ‘그 세번 째 날’ 즉 ‘첫째 날’인 주일로부터 세번째 날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으로 하면 아마도 화요일 될 것 같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흘’은 부활의 의미가 강하다. 창조의 세번째 날에 뭍이 드러나서 생명이 나오기 시작한다. 주님도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4절 – ‘여자여’는 ‘부인이여’라고 번역해야할 것 같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도 ‘나에게 또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혹은 ‘나를 왜 개입시키십니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 ’때’는 카이로스도 크로노스노 아니라 ‘호라’라는 ‘시각’이지만 카이로스적인 개념이 강하다.
5절 – 마리아는 정말 예수께서 무언가 기적을 행하실 줄로 믿고 말했던 것일까? 기록상 주님은 과거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가 기적을 바라고 말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3,4절 말씀으로 보아 마리아는 예수께서 무언가 하실 것을 기대했으리고 본다.
9절 – ‘물로 된 포도주’라고 번역했지만 ‘포도주가 된 물’이 원어적으로 맞는 표현 같다. ‘하인들은 알더라’ 하인들은 물을 채울 때 까지도 뭘하는지 몰랐을 것이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니 연회장은 그 물을 맛보았고 포도주인 것을 알았다. 연회장이라는 사람들은 포도주 맛 보기에는 프로들이기에 취했다고 물을 포도주로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포도주가 된 물이 제일 좋은 포도주 임을 말한다.
11절 – ‘표적’은 사건이 단지 하나의 기적이 아닌 무언가 나타내고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요한복음은 각 장 마다 이러한 표적들로 주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낸다.
사건을 종합해 보니 ‘사흘째 되던 날’ 즉 부활의 날을 상기하신 사건이다. 결혼 잔치로 떠들썩하고 즐기던 때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은 인생의 허무함과 한계를 보여준다. 살아있어도 실은 죽은 것이고 즐기고 웃고 떠들어도 포도주는 떨어진다. 죽음이 그 끝이다. 그것이 사람의 수인 돌 여섯 항아리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죽음의 물을 생기있는 포도주로 바꾸신다.
오늘 말씀은 요한 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의 내용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물을 ‘긷다’라는 단어인 ‘안틀레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4번 만 쓰였는데 오늘 2장의 말씀에서 두 번, 그리고 4장 7절과 15절에만 나온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인이여’라고 하신 주님께서 별로 존경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유대인들에 의해 비웃움 사던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인에게 같은 단어인 ‘부인이여’라고 하셨다.
사람의 인생은 ‘물을 긷는’ 것이다. 어디서 어떤 물을 긷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길음으로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에 동참하고 그것을 누릴지 아니면 계속 갈증을 유발하는 세상의 물을 길을 것인지..
성전이 시장으로 변할 때
우리 말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지만 14절 15절의 ‘성전’은 ‘히에론’이라는 단어로 성전 전체 특히 성전 외부를 나타낸다. 하지만 19절 20절의 ‘성전’은 지성소를 포함한 성소로서 ‘나오스’라는 단어를 쓴다. 다행히도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은 성소와 지성소 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들어갈 수도 없지만) 19절 주님께서 헐라고 한 성전은 바로 지성소를 포함한 성소 즉 당신의 몸 (소마)이었다.
주님께서 표출하신 거룩한 분노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 안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보니 그들이 성전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보다는 그들의 행위가 ‘장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 가운데 제물과 돈이 오가며 성전의 기능이 장사 수단으로 전락했고 영적인 면인 기도하는 마음과 태도는 사라졌다.
오늘 교회들을 생각해 본다. 교회 주차장에서 바자회를 한다거나 점심을 돈 주고 사먹는다거나 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교회 건물은 더이상 성전이 아니고 성전이라고 하면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교회 건물 내에서 바자회를 하거나 그 외 여러 행사를 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함에 있어서 혹시나 ‘장사’로 전락되지는 않는가? 이것이 고민할 문제같다. 장사는 당사자를 위해 이익을 남기려는 수단이며 더우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익을 남기려는 수단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8) 도레안 엘레바테, 도레안 도테’ 물론 사람들은 무언가 거저 받으면 그 가치를 귀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은혜나 사역이 물질적인 이익을 남기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이 요즘 교회들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이 거의 모든 면은 교회의 재정에 관한 문제이다.
주님, 내 마음의 시끄러운 시장이, 주님께서 상을 뒤엎으심으로 평온하게 되기 원합니다. 주님 외에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물질적인 대가를 은근 기대하지 않으며 온전히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는 넉넉함 허락하소서. 올해 기부를 늘릴 수 있는 복 허락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