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큐티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처음 하라고 권한다. 한국 기독교는 아마도 새벽기도가 이미 있어왔기 때문에 새벽기도 후에 또 다시 큐티를 하는 것이 힘들지 몰라도, 요즘은 새벽기도회 자체에서 큐티 말씀으로 하는 교회들이 많아졌고 그래서 아마도 새벽기도회를 큐티 대신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성경적으로 보자면 새벽기도회보다는 큐티가 더 맞다. 주님께서 특별히 제자들을 데리고 새벽예배를 하지는 않으셨고 개인적으로 이른 아침에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시편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주야로 하는 것임을 말한다. 밤낮으로 하는 것이다. 또 큐티 즉 조용한 시간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중얼중얼 하는 시간이다. 1절의 내용이 먼저 나와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복 있는 사람이 이러한 죄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먼저 그의 생각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중얼거리며 묵상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롬 12:2) 때문이다.
사실 큐티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며 또한 나누는 것인데, 아침에는 묵상, 낮에는 적용, 그리고 나누는 것은 밤에서야 가능하다. 내가 살아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어패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용하지도 못한 것을 아침마다 나누는 문제에 대해 거리끼기는 마음도 있다.
시간이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신비로운 것 중에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어제와 다르다. 3절을 보니 마지막에 ‘다 형통하리로다’는 말씀이 사실 많은 이들이 관심하는 것인데, 살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 때문에 묶이고 결정이 매우 애매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 앞 구절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간다. 우리의 삶의 형통과 열매를 맺는 것에는 ‘철을 따라’한다.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철을 기다리며 시냇가에 심겨져서 시내의 물과 양분을 계속 공급받음으로 먼저 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바로 그 비결임을 안다. 형통하게 되는 일은 그 결과이다.
주님, 주야로 말씀을 읊조림으로 마음과 생각이 씨기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며 그 뜻 따라 살게 하소서. 주 안에서의 형통은 세상에서의 형통만이 아님을 압니다. 건강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먼저 서게 하시며, 교회를 볼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