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해야할 것을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공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기에 좀 우습고 안쓰럽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기본은 지키는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 (혹은 침례자 요한)이 누가복음 3장에서 사람들에게 당부한 말도 지극히 기본적인 요구였다. (눅 3:11-14 …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세리)...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군인들))
상전들은 종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하고, 믿는 이들은 기도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어야 하며,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로 동역하고, 비신자들에 대해 전도는 하되 그들과 너무 어울려서 허송세월하지 말아야 하는데, 특히 말조심을 해야 한다. 또한 주의 종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당부했을까? 기본이라는 것이 자칫 놓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으로 돌이키고 초심을 돌아 보는 것이 한 해 마지막을 맞으며 해야할 것 같다. 올해 처음 한 해 목표를 돌아보니 중간에 역시 흐지부지 되었다. 기본을 하지 못했다.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러한 사항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 같다… 기본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 공동체에서 만나는 여러 인물들, 당기는 삶 (4:10-18)
46년간 종교생활+신앙생활 해오면서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 나 역시 다른 이들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 하나겠다. 어떤 이들은 한 두번 얼굴보다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교회의 귀한 일꾼으로 만나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한 때는 정말 열심이다가 아예 신앙 생활을 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된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이번 말씀이 그런 경우 같다. 문제를 일으켰던 바나바의 조카 마가는 이제 바울과 함께 남아 바울에게 힘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며, 바울의 위로가 된 유스도 예수도 있고, 골로새 교회를 섬기다 이제 바울을 방문한 에바브라, 누가복음을 쓴 누가,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 역시 나온다. 골로새서가 주후 60년경 그리고 디모데후서가 67년 경이라고 하니, 데마는 7년이 못되어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택했다. 자기 집을 내어준 눔바같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원한 것을 아직 지키지 못하는 아킵보도 있다.
또 9절의 오네시모처럼 다른 교회를 방문하는 중, 혹은 새로운 교회로 옮긴 후에, 자기에게 사기친 혹은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이 버젓이 장로가 된 것을 보고 놀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채 장로가 되었다면 문제지만, 개정본에는 나오지 않아도 원어 사본에는 마지막에 ‘로마에서 골로새 사람들에게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손으로 씀’이라는 말이 나온다. 오네시모는 처음에는 이름만 ‘쓸모있는 머슴’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왔지만, 나중에는 골로새서를 바울로부터 받아쓸 정도로 무식한 노예에서 학문과 신앙이 쌓인 인물로 성장한 정말 ‘유익한 노예’로 성장했다. 이런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아무튼 이러한 여러 인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어떠실까, 그리고 이러한 사역 가운데 있던 바울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여러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문안하라고 권유한 바울의 심정은 아마도 끈끈한 신앙의 관계를 다짐으로 복음 안에서 자라고 열매 맺으라는 바람같다. 이 ‘문안하라’는 단어는 ‘아스파조마이’라는 단어로 ‘문안하다, 기쁘게 영접하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뜻은 ‘자기 자신으로 끌어 당기다’는 뜻이다. 믿는 이들의 삶은 서로를 자신들에게 끌어 당기는 삶이다. 서로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 당기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기시기는 것 처럼 (고후 5:14), 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당기는) 것 처럼 (히 7:19, 10:22) 성도들은 서로를 당긴다.
서로 끌어 당기면 아무래도 냄새도 날 수 있고 전에 보지 못하던 부정적인 모습도 보게 된다. 그러한 것 조차 기쁘게 받는 것이 바로 문안이다. 바울은 아마도 데마에게 나타나는 여러 모습에서 7년 후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는 골로새서에 그의 이름을 기록하며 북돋아 준다. 바울은 데마의 부정적인 것들도 받아줄 수 있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니꼬운 모습조차 반갑게 맞아줄줄 아는 이들이다. 그래서 은혜가 있다.
주님, 가면을 쓰고 사는 모습이 슬프지만 가면을 벗게되면 나의 부정적인 것들이 노출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체 삶은 서로를 기쁘게 있는 그대로 받고 서로 끌어 당기는 관계임을 믿습니다. 각 사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그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서로 끌고 끌어 당기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