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화가 독특한 것은 ‘위치’를 분명히 함으로 관계를 다지는데 있다.  물론 다른 문화도 그런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분명 각자 자신의 위치를 찾고 그 위치를 떠나지 않음에 미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전통적인 모습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21세기에도 계속해서 큰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남아있다.  기독교가 일본에서 별 큰 성장이 없던 이유 중 하나가 아마도 그런 이유에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와 교회가 없이도 그들의 문화 속에는 위치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어 가정과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아닌게 아니라 우찌무라 간조가 처음 그리스도를 접하고 일본인들에게 전도하기를 힘썼지만 서구 세계를 경험하고 다시 일본의 문화를 귀히 여겼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유리한 면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가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오늘 말씀은 정말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 ‘주 안’ ‘주’ ‘그리스도’라고 거듭 언급하며 말씀하고 있다.  ‘영성’하면 무언가 신비롭고 깊고,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흔들고, 방언을 말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미래를 예지하거나 하는 등 일상 생활을 초월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까발린다.  정상적인 영성은 종교 생활을 위한 것도, 특별한 경험을 위한 것도 아닌,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있고, 이것은 주를 위하고 섬기는 것이며, 주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롬 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고 하는 점이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가 된다.  즉 우리의 일상 생활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예배학’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예배학’은 종교적 집회의식에 국한된 반면, ‘영적 예배’는 삶 자체의 모든 모습을 말한다.  아무리 ‘예배학’을 따라 집회를 은혜롭게 마쳤다고 해도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질서와 위치의 문제이며 바로 관계의 문제다.

부부 싸움의 많은 부분은 소위 ’기싸움’인데, 서로 자기 주장을 높이며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믿는 이들의 부부 사이에서 이러한 기싸움은 흉악한 것이며 이것은 남편이나 아내 특히 아내가 자신의 위치를 떠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18절 – 먼저 아내들에게 말하는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복종’의 원어는 ‘밑으로 가다’는 뜻의 ‘ὑποτάσσω’라는 단어로 ‘후포’라는 말과 ‘타쏘’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후포’는 ‘~의해 혹은 ~아래’라는 뜻이고 ‘타쏘’는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다.  즉 복종이라는 말은 위치의 문제이고 질서의 문제다.  그리고 그 질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 안’에서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질서를 떠나는 것은 신앙의 가정에 큰 위협을 가져온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서 맞벌이 부부 혹은 아내가 더 많은 수입을 얻는다 해도 믿는 가정과 부부 사이의 질서는 아내가 남편 아래 있는 것이다.

하와가 뱀에게 꼬임을 당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이유와 상황은 아담을 떠나 혼자 있을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하와는 그러한 경고를 직접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담으로서는 하와에게 그 중요한 말씀을 잘 전달하지 못한 과오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하와의 실수는 남편을 떠나 혼자 있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즉 남편 밑에 있어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떠난 것이다.  위치의 문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19절 -  남편은 아내를 아가페해야 한다.  즉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괴롭게 해서는 안되는데, 이말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창자를 뒤틀리게 해오다’는 뜻이다.  즉 아내의 창자를 튀들리게 해와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창자를 뒤틀리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습관과 관계된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몸에 베인 습관 중 좋지 못한 것들이 뒤풀이 되면서 가장 가까이 함께 사는 아내에게 짐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고, 이것이 계속 겹치면서 분노가 될 수 있다.  본인 생각에는 아가페한다고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것들이 나올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아내의 복종을 요구하는 면이 아니라 자신이 고쳐야 하며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두 절의 순서를 두고 말이 많을 수 있다.  아내를 먼저 언급했으니 아내가 모든 것에 먼저 순종해야 한다.  혹은 그리스도가 먼저 죽었으니 남편에게 복종하기 전에 먼저 남자가 죽음으로 아가페 사랑을 보여야 한다라는 등의 주장을 할 수 있다. 

원어에서 보통 두 문장을 연결할 때 ‘kai’를 쓰는데, 재미있게 이 두 구절은 그렇게 연결되지 않았다.  18절은 the 의 뜻인 ‘하이’라고 시작하고 19절은 ‘호이’라고 시작함으로 두 문장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순서는 아내에 대한 명령이 먼저지만, 누가 진짜 먼저인지 상관없다.  누구든지 먼저 복종하라, 먼저 사랑하라.  부부 사이에 많은 문제가 있고 여러 해결 방법이 제시될 수 있지만 바울은 단 두 줄로 간략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 두 줄이 모든 문제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이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이여, 아내를 아가페 하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스트레스가 되지 말아라.  기싸움을 멈추라!

20절 – 자녀들에게 명하는 말씀 역시 ‘주 안’을 언급 한다.  복종이나 순종은 ‘주 안’에서 가능하며 ‘주 안’이라야 의미가 있다.  억압이나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것은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고 그 한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의 ‘순종’이라는 단어는 ‘ὑπακούω’라는 말로 위의 ‘복종’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후포’는 같지만 ‘아쿠오’라는 단어는 ‘듣다, 이해하다’의 뜻이다.  이 두 단어의 합성으로 ‘말을 듣다 혹은 마음을 헤아리다’는 뜻이 된다. 

이민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드는 생각은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왜 말을 안들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발언이다.  사실 그러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말을 해서’ 듣는 다기 보다는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헤아림으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철이 들어야 한다.  그렇게 철이 들어서 부모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순종하면 그것이 주 안에서 기쁨이 된다.

21절 – 아비들 역시 아이들에 대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안에서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분노를 일으키면 그 결과는 ‘낙심’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자신들의 화를 잘 다룰 수 없기에 결국은 포기를 선택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대강 대충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두려움으로 눈치만 보는 양상을 띠게 된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먼저 아이들에게 노를 발하는 것일 수 있다.  약 1:20에서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라고 말씀한다.  아이들에게 성을 내거나 짜증을 내어서 되는 것이 없다.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과 파괴를 낳는다.  그래도 가끔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나의 모습이 많이 실망스럽고 슬프다. ㅠㅠ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능력 이상을 강압하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려면 단지 명령하거나 시키는 것 외에도 ‘함께’ 해야 한다.  처음에는 함께 같이 함으로 그들이 배우고 능력을 키워나가게 해야 한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들이 뭔가 알고 있을 거라는, 또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얼마나 그들의 어린 시절을 그냥 허송했는지… 그들이 공부할 때 옆에서 TV나 셀폰을 보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그래서 아마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나보다.  쉬워보이지만 어려운 것,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며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22절 – 시대가 변해서 ‘노예’들은 없지만 어차피 직장인들은 시간과 노력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 대가를 얻는 종들일 수 있다.  요즘은 ‘상전’의 개념도 많이 흐릿해 졌지만, 그래서 더욱 일을 함에 있어 ‘주님’이 우리의 기준이 되신다.  ‘주를 두려워하여’의 ‘두려워하다’는 말은 ‘무서워하다’는 뜻으로 계시록의 영원한 복음인 14: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의 말씀 그리고 15:4, 19:5 등의 구절과 동일한 단어인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리고 인정는 것이 그 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23절 – 다시 한번 주님이 기준이심을 말씀한다.  생활 모든 면에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인데, 다른 이들을 주께 대하듯 대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배려없고 무례한 세상은 주님을 모르는 세상이고, 질서와 위치가 뒤죽박죽된 세상이다.

24절 – 이러한 정상적인 믿음 생활 혹은 영성에는 ‘상속의 대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분은 세상의 보스가 아니라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신 주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25절 – 이러한 기본적인 삶의 기준을 살지 않으면 그것은 말로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삶은 불의의 삶, 즉 주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삶이 되고 불의의 대가를 받는다.  이 ‘불의’라는 단어는 계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와 같은 단어이다.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는 원어는 ‘주’라는 단어가 없이 ‘편애가 없다’이다.  기준은 ‘편애’가 아니라 ‘주’시다.

주님,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먼저 사랑하고 참고 함께 하게 하소서.  계속해서 실패하지만 이러한 약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아내가 내 밑에 있어야 하는 것 처럼 나도 주님 밑에 있게 하소서.    내가 먼저 주님 밑에 있으면 아내나 아이들이 내 밑에 있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손을 뻗쳐 주님 만지고 주님께 힘을 얻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