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옛날이야 이런 기록을 신화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정말 믿음으로 받았겠지만 요즘 같이 과학 특히 생명공학 분야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7000/2006/01/p002007000200601101749306.html 물론 아직 과제가 남아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이고 연구에 많은 진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은 영적으로, 영 안에서 믿음으로 이해가 가능한 것이며, 또한 믿음 자체 역시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음과 같이 종교적인 신념이나 맹목적 신앙이 바탕이 아니라 모든 것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은 다시 그 바탕을 로고스 말씀에 둔다. 오늘 말씀 22-23절은 주님의 나심이 미리 선지자로 선포되어진 말씀이 있기에 가능함을 말한다. 즉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또한 성령은 그 사역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힘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결과는 항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로 주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오순절 계통의 사역들이 이러한 경계를 허무는 것 같다. 오순절 사역 자체는 귀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이 21세기에도 동일하심을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행에 있어 성경 말씀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많아 문제다. 성령께서는 항상 말씀에 입각한 사역을 하신다. 성경에 있지도 않은 신기한 것들이 나타나고 또 그 결과가 좋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경계를 축소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말씀이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며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임마누엘이다.
주님, 어떨 때는 임마누엘이 버겁다는 느낌입니다. 만유의 주께서 어떻게 우리 가운데 계시는지요. 역시 주님은 힘없는 자, 갖지 못한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사오니, 나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주를 추구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모든 혼잡함을 떠나 말씀 안에 거하게 하소서. 말씀 안에 있을 때 주를 만나고 주의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잔잔하지만 강한 주의 말씀이 오늘 믿는 이들을 주관하시고 주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