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예수님의 생일이 아닌 것을 알 때 대강절을 보내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고 성탄절은 주님의 생일이 아닌 주님 오심을 기뻐하는 날로 누리면 될 것 같다.  어릴 적 매년 성탄절에 기다리던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제 나이를 먹고 또 이것 저것 알게 되니 몸에 맞지 않는 옷 처럼 느껴진다.

다만 성탄절 뿐만 아니라 매일 계속해서 묵상하고 상고하며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을 ‘화육신’으로 번역할 수도 있었는데 ‘되다’가 아니라 ‘이루다’는 한자를 썼다.  즉 단지 몸이 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었다.  성경에는 ‘성육신’이라는 말은 없지만 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구절로 성육신이라는 단어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되다’라는 말은 ‘에게네토’라는 말로 ‘이다, 되다’ 등의 뜻이기 때문에 ‘이루다’는 뜻은 아니지만 유독 한문권에서는 ‘성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마도 이미 ‘화신 (化身)’ 이라는 개념이 힌두교 (아바타)와 불교 (화신) 등에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환생’이라는 개념도 영어 단어에서는 incarnation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기 때문에 헷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독특한 계시와 진리인데, 타 종교 처럼 신적인 존재가 인간이나 혹은 여러 다른 모습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요 1:14, 18)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땅에 오셔서 고난의 삶을 살고 단번에 바쳐진 제물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독생하신’이라는 단어인 ‘모노제너스’라는 말은 ‘동일한 단 하나’라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로는 ‘호모제너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동류 혹은 동질’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비슷한’ 뜻이지만 ‘같다’는 뜻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이요 성육신 사건이다.

이러한 주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이제 다시 오신다.  성경에서는 초림 때에는 ‘아기 예수’로 태어나시지만, 재림 때에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11)’ 는 말씀처럼 더 이상의 성육신이 필요없다.  이미 성육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초림 때에는 섬기시고 제물로 바쳐져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 때에는 심판주로 오신다.

재림을 바라보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당시 구약의 여러 말씀에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했고 종교인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도 알았지만 (마 2:5)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기다림의 대상에 삶의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확실히 언제 오실 지 모르는 분에 대한 기다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온전한 기다림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의인 또는 선지자로 칭한다.  시므온 (눅 2:25)이 그렇고 안나 (눅 2:36)가 그렇다.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세워 거기에 따라 살거나 자신의 포부를 이루기 위해 살지 않고, 사는 기준이 기다리는 사람에게 맞춰진다.  기다리는 대상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권리도 쓰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믿음 생활이란 기다리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며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에게 전도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은 분명 위대하고 귀한 일이지만 그러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믿음의 색깔은 기다리며 인내하는 삶임을 본다.

주님,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 단지 허송세월하지 않게 하소서.  기다림을 통해 성장하게 하소서.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다시 오실, 지금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