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절 – ‘그러므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율법 법조문을 끝냈으므로 율법적인 것들, 즉 먹고 마시는 문제,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음식 구분, 여러 절기를 지키는 문제 특히 안식일 등에 대해 자유로와야 한다. 유대교의 모든 절기나 안식일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해야 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다시 만들어낸 것들 즉 주일 성수 부활절 성탄절 등 역시 ‘지키는 것’이 되서는 안된다.
전에는 성탄절이 정말 주님의 탄생일인줄 알았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비추어보면 주님 태어나신 때는 아마도 늦여름 초가을 아닐까 한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해 기독교의 위세가 줄면서 ‘크리스마스’를 더 이상 ‘크리스마스’로 부르지 않고 ‘할리데이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크리스마스 자체가 세상 여러 민족들의 민족 종교나 미신 등을 한데 어우를 수 있는 절기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절기를 포함해 아프리카 여러 미족들 등 여러 절기가 겹친 연말이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요즘은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메리크리스마스’한다.
여호와 증인들이이 좀 오바해서 자신들의 생일도 그냥 지나친다고 하니 다른 것을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절기나 축제 등은 사실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기분전환의 기회도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즐기고 누리는 것을 떠나서 ‘법’으로 되면 즐기기 위한 것이 오히려 묶이게 하는 것이 된다. 더우기 참된 본질인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그러한 것이 우선시 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에서 자유하다.
17절 – 여기에서 ‘몸’은 앞 구절에서 말한 사람의 몸일 수도 있지만 1:18에서 ‘몸’은 교회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교회를 가리키는 면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장래’ 즉 올 것들 혹은 될 것들의 그림자 즉 본질은 아니다. 그에 비해 교회 자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율법은 ‘오실 그 분’ 그리스도를 계속 예언했고,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해 또 다른 비밀인 교회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본질임을 말한다.
18절 –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겸손함이지만, 정말 진리가 밝히 나타났는데 ‘일부러 겸손함’은 악한 것이다. 영지주의의 실체는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것을 부정한다. 많은 것에 대해 ‘그럴 수 있다’라는 입장으로 겸손하게 보이지만 정확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하지 못한다.
천사 숭배의 ‘숭배는’ ‘뜨레스케이아’라는 단어로 영어에서는 religion 즉 종교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 혹은 예배함’인데, 거룩한 두려움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이다. 더우기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 즉 하나님의 종을 두려워해서 숭배하는 문제이고 ‘메신저’는 악한 천사도 포함하기에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영적인 존재를 접해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뜰 수는 있겠지만,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게 될 때가 매우 많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말씀까지 바꾸어 버릴 수 있기에 천사의 말 정도는 과장해서 받기 매우 쉽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이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칠 경우 ‘상을 빼앗’길 수 있다. 우리의 상은 그리스도시다.
19절 – 머리 즉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요 죄가 된다. 소위 ‘영성’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성에 의지할 수 있는데, 그러면 머리를 붙들지 않게 됄 수도 있다. 머리 즉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를 위하시는데, 결국 우리의 영적 생활의 내용과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로서 자라는 것이다. ‘마디와 힘줄’은 교회 내에서 ‘먼저 선자들’로서, 이들을 통해 머리로 부터 공급함이 있다. 또한 자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이다.
20절 – 다시 말씀하는데, 믿는 이들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세상 시스템 자체가 영적으로 보면 초등 학교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세상에서 살아도 법적으로나 위치적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들인데, 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냐고 반문한다.
21절 –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문제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다. 이것이 나쁜 것 혹은 악한 것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것들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악한 것들은 멀리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악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
22절 – 바로 율법이고 특히 그 중 ‘사람의 명과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더해 그들만의 여러가지 금할 것들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본질이 아니기에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간다. 즉 영원하지 못하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23절 – ‘자의적 숭배’는 종교적인 모든 것이다. 종교는 사람의 노력이다. 또한 영지주의적인 겸손과 영지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몸을 괴롭게 함으로 영적인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도 ‘지혜 있는 모양’이지만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 혹은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가치가 조금도 없다.
영지주의의 내용이 간단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언급으로 봐서는 기독교 진리와 영지주의가 서로 맞물려 보이는 것들이 있을 수 있기에 구별을 해야 하는데 너무 복잡해지지 않으려면 바로 다음 3장의 권함을 따르면 된다.
3:1절 – 결국은 이것 저것 따질 필요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아야 한다. 즉 세상이나 종교나 몸이나 영이나 혼잡해 지지말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위를 바라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다시 살리심’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도 했다.
철학이 처음에는 사람 외의 것들 즉 세상과 우주를 향했지만 점점 발달하게 됨으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내면을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적인 문제는 내면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실망과 사망이 가득하다. 영지주의의 한계는 그 방향이 인간의 내면을 향하는데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내면을 보며 그 더러움에 회개하며, 또한 구원받은 후에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항상 그 향하는 곳은 ‘하나님 우편의 그리스도’이다. 기도 역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한다.
2절 – 생각 역시 위를 향하고 땅을 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쁘로네오’인데 ‘느끼다, 생각하다, 이해하다’등의 뜻이지만 마음을 향하는 관심의 문제다. 즉 우리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바라는 것을 하늘에 맞춰야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 즉 개인적인 문제나 기독교 전반의 문제 등은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두지 않기에 일어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느낌이다.
3절 – 관심을 하늘에 두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가 세상에 대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인데, 너희 ‘생명’의 생명은 ‘목숨’이 아니라 ‘영원하신 생명’ 즉 ‘조에’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기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4절 –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 (조에) 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5절 – 그래서 행동 지침이 있는데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는 것이다. ‘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 즉 두 팔과 두 다리인데, 이 ‘죽이다’는 단어는 ‘살게 하다, 움직이다’의 반대말로 이어지는 것들에 대해 움직임을 없애다 혹은 힘을 빼다라는 뜻이다. 즉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다. 그런데 ‘지체들’은 보통 4개인데 목록은 다섯이다. 원어를 잘 보니 앞의 네개는 계속 이어지는 반면, 뒤의 ‘탐심’은 ‘kai’를 써서 따로 떼어 놓았고 부연 설명으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정의해 놓았다. 앞의 네개 즉 음란, 더러움, 지나친 열정, 악한 욕구 등은 ‘지체들’인데, 생각해 보면 이 네개의 것들은 그것들이 뻗어 나오게 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탐심’임을 말씀하는 것 같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것’인데, 현재 소유에 만족 못하고 더 가지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임을 밝힌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외의 것을 숭배하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바로 탐심이 있다.
6-7절 -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 믿는 이들도 전에는 그렇게 살았고 그 것이 삶의 목적이었지만
8절 -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우리 입에서 화내는 것,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을 하지 못하면 우리 입에서는 부정적이고 사망으로 가득한 것이 나온다. 아…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9-10절 -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행위와 함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우리 자신을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으로 새롭된 자다. 여기서 옛 사람, 새 사람은 모두 단수격이다. 계속 ‘너희들’에게 말하지만 옛 사람들 새 사람들이 아니라 단수인 ‘옛 사람’과 단수인 ‘새 사람’이다. 즉 옛 사람 아담에 속한 이들이 이제 새 사람 그리스도에 속해서 그를 입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렇게 새 사람씩이나 입었는데도 거짓말하고 음행하고 탐심이 있고 하는 등의 것이 가능한가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새사람을 입어도 악한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 권하며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은 아직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계속 받아야 한다.
11절 – 이러한 기준에는 차별이 없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인데, 쉽게 말해 배운자나 가방끈이 짧은 자나 문화인이나 야만인이나 관계 없이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악하기 때문이고 탐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이것은 범신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보편성과 우주성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기준이시다.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만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기준이심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다.
12절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하는데, 이번 옷은 복수이고 그 내용은 깊은 긍휼들이며, 그러한 것은 ‘친절함,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나타난다. 긍휼은 그냥 측은히 여기기만 해서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친절하고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는다. 위에서 '겸손'이 부정적으로 쓰였지만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 앞의 나를 보는 것이 겸손이다. 아무튼 불쌍히 여길 이들에 대해 얼마나 빨리 포기하는지… 문화적 정서적 지성적 등의 차이를 핑계대며 나의 긍휼은 너무 짧다…
13절 –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차이로 인해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관점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며 무엇보다 죄성이 있기 때문에 불만이 표출된다. 그럴 때 그러한 불만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처럼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이 ‘용서’라는 단어는 ‘은혜를 베풀다, 친절하게 대하다, 용서하다, 대가없이 주다’ 등의 뜻이다. 공동체에서 은혜와 공의 둘 모두 필요하지만 은혜가 좀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적어도 몸된 교회를 상하게 하거나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는 죄가 아니라면..
14절 - 이 모든 것 위에 아가페 사랑을 더해야 하는데, 원어에는 ‘더해야 한다’는 말이 없고, 단지 ‘이 모든 것들 위에 아가페 사랑’이다. 즉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 하다. 이것이야 말로 온전하게 매는 띠이기 때문이다.
15절 – 믿는 이들이 부르심 받은 것 중에 중요한 한 면은 ‘평강을 위한 부르심’이다. 그리고 그 평강은 그리스도의 평강이다. 이 평강은 요 14:27의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의 그 평강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들 안에서 통치하셔야 한다. 그래야 탐심에서 자유해지며 감사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 나의 마음의 평강을 흐트리는 것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데 이것은 ‘다스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지 않으면 다른 것에 의해 다스림 받게 된다.
16절 –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 가능하다. 특히 모든 지혜 안에서 풍성히 거해야 한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 안에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해야 하고, 주님께 우리 마음 속에서 은혜를 가지고 노래해야 한다.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이 교리를 공부하는 것 처럼 딱딱하고 힘든 일이 아니라 은혜로운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를 함께 주님을 향해 부르는 기쁜 것이 될 수 있다.
17절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준이시요, 이유이시요, 힘의 원천이시다.
주님, 그리스도를 서로 누리며 그 안에서 새 사람을 입어 한 몸을 이루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실현이 교회 안에 있게 하소서. 그리고 가정 안에 있게 하소서. 나 가진 것 외에 더 욕심 부리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지식에 까지 또한 감정 역시 그리스도께 자라게 하소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