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 –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 이건 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사실 ‘성육신’ 자체도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당시 영지주의에 철퇴를 가하는 선포다. ‘신성’은 Godhead 즉 하나님 자체의 모든 충만 (성령 충만의 그 충만)이 몸에 거하신다. 이 ‘육체’라고 번역된 것은 사실 ‘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육’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1절에도 나온다. 몸은 ‘소마티코스’라는 단어이고 육은 ‘사르코스’라는 단어이다. 육은 죄를 뜻한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겉으로 보면 그냥 사람이다.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소위 말해서 ‘후광’이 비춰서 특별하게 보이는 분이 아니시다. 그냥 거리에 나가면 만나게 되는 보통 사람처럼 생기셨다. 그런데 이러한 분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 이것은 신비를 넘어 의아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신성을 인성으로 거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 인생으로 신성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레트로 엔지니어’다.
10절 – 보다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하신 분의 충만으로 인해 믿는 이들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 우와우우우우아!!! 뭔 말이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그 안에서 우리에게도 있다고? 정말? 정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숨 넘어 간다.
11절 – 또한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요, 마음의 할례이다 (롬 2:29). 이것은 또한 죄의 ‘사르코스’의 몸을 벗는 것이다 (원어). 즉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심히 죄된 나의 육신을 벗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절에 정의 된다.
12절 – 그 그리스도의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며 물을 통과할 때 받은 것과 같은 침례다. 출애굽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들 외에 다른 민족들 역시 함께 출애굽을 했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한다. 즉 그 중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홍해를 통과할 때 같은 침례를 받았다. 물로 들어가 옛 애굽 생활이 장사되고 다시 뭍으로 나와서는 새롭게 태어나고 살아남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침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즉 우리는 소위 ‘장례식’을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장사되고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에 믿는 이들의 죽음은 사망이 아니라 자는 것이 된다.
13절 - ‘범죄’라는 말은 보통 죄를 말하는 ‘하말티아’와는 다른 것으로 ‘행위의 타락’을 말한다. 즉 습관적인 범죄함이다. 12절의 ‘죽은 자’는 육신적인 죽음이지만 여기에서 ‘범죄와 무할례로 죽’은 것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끊어진 관계다. 이러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사하셨다. ‘사했다’는 말은 ‘너그러히 봐주다’는 뜻이다.
14절 –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교리의 손기록을 지워버리시고 우리 앞에서 치워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원어에는 ‘불리하게 하는’이라는 말과는 좀 다르지만 ‘불리하게 하는’의 번역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항상 이러한 기록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을 불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기려 하심이라 (롬 3:4)’는 말씀이 있는데, 이러한 불리하게 하는 것을 끝냈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껏 주님께 나갈 수 있다. 그 손기록은 사람이 쓰기도 했지만 원래 하나님 당신이 손수 기록하신 율법이다. 그러한 교리의 손기록을 지워버리시고 치우신 것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아예 끝을 내버리셨다. 율법의 정신은 남아있지만 율법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이 된다.
15절 – 문자적으로 ‘권세와 정사들을 옷벗겨서 드러내놓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여 그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셨다’ 이다. ‘벗기다’는 11절의 육의 몸을 벗다와 같은 어원이다. 원수들이 항상 참소할 수 있던 바탕은 선한 율법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기록을 끝냄으로 더 이상 그들의 참소는 효력이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무기를 빼앗겨서 벗겨졌고 그들의 참소는 웃음거리가 되고 구경거리가 된다.
여기서 십자가 사용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십자가는 목거리나 장신구로 만들어서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장신구를 하면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십자가는 장신구로 사용하거나 드라큘라를 대적할 때 쓰거나, 잘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주술적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꼴사나운 사람들에 대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끝내는데 사용해야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셨지만 동시에 나 자신도 달렸음을 봐야 한다. 십가가는 저주의 형틀이며, 달고 다니려면 이쁘고 반짝이는 모양이 아닌, 혐오스러운 모습의 십자가에 나 자신의 형상을 달아야 한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나도 함께 달려 죽었음을 다시 생각합니다. 침례를 통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난 것을 기억합니다. 믿음 생활의 많은 문제들은 내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고 자꾸 내려오는 것임을 봅니다. 오늘 십자가를 나에게 적용하게 깨우쳐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