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에 유리 보석을 빛에 비추어 보며 신기해 했던 적이 있다. 그 가공된 모든 각과 면들의 섬세함과 거기서 반사되는 빛의 아름다움을 한참 쳐다본 적이 있었다. 진짜 비싼 보석이나 금덩이가 집에 있다면 그 있다는 자체만으로 기쁘고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당장 해결된 것도 아니고 상황적으로 변한 것이 없지만 그러한 보화를 소유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큰 기쁨과 위안을 준다. 그러한 가치있는 것은 언제라도 팔아서 내가 필요한 것과 바꿀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가치 있는 것을 소유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기쁨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한 그리스도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에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손해가 된다. 그래서 바꿀 수 없다.
오늘 말씀은 보화로서의 그리스도가 다시 조명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세상의 그 어떤 세공자도 흉내낼 수 없는 각과 면을 가지고 당신 자신이 빛을 발하신다.세상의 보물은 도둑 맞을 수도 있지만 하늘의 보화인 그리스도는 소유한 자에게서 빼앗길 수 없다. 물론 사탄은 세상의 여러 가치 없는 것을 이용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하지만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는 빼앗길 수 없다.
그런데 가끔 궁금한 것은, 정말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그리스도를 나누는가? 그리스도께 집중하는가? 많은 교회들 설교의 적지 않은 부분은 삶의 교훈이나 위로에 치중될 때가 많다. 믿으라고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얼마나 귀하신지, 얼마나 생명이 풍성하신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전도사로서 설교를 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어떠함 보다도 학생들에게 삶의 지혜나 성경지식을 전해주려는 유혹이 더 강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그 생명의 누림이 부족해서 였을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매주 설교의 주제가 될 만큼, 그리고 만날 때 마다 주제가 될 만큼 부요하실까? 오늘 말씀 3절에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여져 있느니라’고 말씀한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배우려면 평생 배우고 익혀도 다 알지 못하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그 안에 있다. 아마 그래서 우리에게 영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단지 기본적인 복음에만 (물론 그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머물러 있고, 단단한 음식은 (히 5:12)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큐티를 하며 성경을 연구하다 보니 바로 이러한 단단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 큐티라는 생각이 든다.
1절 – 바울은 자신이 이미 만나고 알고 있는 성도들은 물론, 보지도 못했던 골로새 성도들과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애쓰며 사역했다. 골로새 교회 역시 소아시아에 위치했었으며 라오디게아와 매우 근접한 위치에 있던 지역이다.
2절 – 바울의 애씀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이 위안을 받음으로 아가페 사랑 안에서 함께 (실이 짜여지듯이) 짜여지며, 이해의 확신의 모든 충만함 안으로 하나님의 비밀 곧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당시 많은 소아시아 지방이 그렇듯이 여러 문화와 사상이 편만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붙잡을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고,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비밀이며 -
3절 –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가치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 ‘보화’ 는 ‘떼사우로이’라는 말로 보석 자체라는 말보다는 보석들이 담겨진 ‘보고’라는 말에 가깝다. 이러한 ‘보고’들이 여러 개 있는 복수다. 그리스도 안에는 보석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석들이 가득 쌓인 보고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들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힘을 내어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그냥 흘러보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고’다. 잠언에서 지혜가 가장 귀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으라고 한다. (잠 4:7) 이제는 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고인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
4절 – 당시 골로새 지역은 ‘교묘한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이 ‘교묘한’이라는 단어는 ‘설득력 있는’ 의 뜻이다. 세상의 유혹은 비논리적이지 않다. 꽤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사실상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다.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으면 설득당하기 쉽다. 그것들은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이다.
5절 – 바울은 그들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영 안에서 그들의 상황을 모두 인지하며 기뻐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 안으로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게 되고 정렬 되어 있었다.
6절 –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그 주’로 영접했다. 단지 ‘주’가 아니라 ‘그 주’시다. 즉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신 ‘그 주님’이시다. ‘주님’이라는 말이 이제 기독교적인 용어 (jargon)이 되어 버려서 너무 일반화된 느낌이 있어서 가끔 ‘주인님’이라고 대신 부를 때가 있다. ‘그 주인님’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시다. 그러한 주를 섬길 때 나는 왕의 위치에 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걷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길이요, 우리의 길이며, 나의 지경이요 우리의 지경이시다. 내가 밟는 곳이, 우리가 밟는 곳 그 땅이 그리스도가 되신다.
7절 – 믿는 이들은 그 분 안에 뿌리가 박혀졌고, 세움을 받아 오는데, 이 ‘세움 받아 오다’는 단어 ‘ἐποικοδομέω’는 여러 단어의 합성어이다. ‘건축하다’라는 뜻의 이 단어는 ‘에피’와 ‘오이코도메오’의 합성어인데, ‘오이코도메오’는 어제 ‘오이코스’ 즉 집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 ‘집을 짓다’의 뜻이다. 즉 이 단어는 개인적인 믿음을 세우는 뜻이 아닌 하나님의 집을 세우라는 복수격의 명령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신앙을 세우고 돌보는 것이 우선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결국 공동체로서 서로 세움을 입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 안에서 감사함으로 (안에서) 다시 그 믿음 안에서 엄청 기뻐(페~리수오!)해야 한다.
어릴 때는 돈의 가치를 모른다. 과자만 좋아하고 캔디만 좋다. 하지만 돈의 가치를 알게되면 과자보다 돈을 원한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게 되면 그 믿음 안에서 ‘엄청 기뻐’할 수 있다. 그 가치를 아니냐 모르느냐의 문제다. 결국 계시록에서는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도 보화들이 된 것을 보았다.
주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꾸면 바보가 되는, 가장 귀한 보화이신 그리스도의 한 면을 오늘도 보고 느끼고 배우며 누리기 원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가치가 되고 생명이 되고 위안과 만족이 됨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엄청 기뻐하며 서로를 세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