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 말씀 정말 깊고 풍성해서 이걸 다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겠다.
바울은 오늘 비밀을 벗겨내면서 하나님의 집과 그 경영법에 대해 언급하고 그것과 더불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 말한다.
21절 – 골로새서의 수신인은 골로새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다. 이들은 전에는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들’이었다. ‘멀리 떠나’라는 단어 ‘ἀπαλλοτριόω’는 엡 2:12에도 나오는데,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에서 ‘나라 밖의 사람’과 같은 단어이다. 그들의 행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마음 (혹은 생각)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심적으로 지성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원수가 되었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화목케 하셨다 (원어에서는 21절에 나옴, 술어가 먼저 나오는 헬라어를 번역했기 때문에)
22절 – 다시 한번 복음의 핵심을 말씀한다. 화목케 하신 방법은 ‘그의 (그리스도의) 육체 안과 그의 죽으심을 통해’ 골로새 사람 혹은 이 서신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자들로 세우려 하심’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이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만드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참된 제물로서 단번에 하나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게 세우심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23절 – 화목케 된 것은 시작이고 기회지만,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세우심 받기’위해서는 ‘이미 터가 박히고 굳게 된 믿음을 향해 분투하고’ 즉 이 믿음은 그들의 주관적인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마련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믿음을 말한다. 그러한 믿음을 향해 분투하고 또 ‘너희가 들어온 복음의 소망으로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가능하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 안에서 선포되어온 것’인데,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일꾼’으로 번역한 단어는 ‘집사’라는 단어다. ‘집사’는 그 말 자체가 ‘일꾼’이다. 머슴이다. 그는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딤전 5:17) 면에서는 ‘함께 된 장로 (벧전 5:1)’요, 교회를 ‘보살피는 (행20:28)’ 일에 대해서는 감독이요, 하나님의 집에서 말씀과 그 외 필요한 것을 나눠주는 사역을 할 때는 ‘집사’였다.
24절 – 지금 바울의 입장은 마음대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감옥에서 ‘매인’ 입장이다. 이제껏 받은 고통은 물론이요, 지금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고통 받는 것을 단순히 허송세월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즉 골로새 사람들과 그 외 여러 곳곳의 교회들을 위해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다 이루셨지만, 그의 남은 고난은 아직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실히 따르는 이들이 경험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살며 고난을 통해 앞으로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고난은 대게 육체를 통해 온다. 정신적 고통이나 감성적 고통도 있고, ‘영적인 고통’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육체적 고난이다.
25절 – 다시 ‘집사’인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12년간 전도사로 불리다가 지난 4년 집사로도 불리게 됐는데, 사실 집사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이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3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있었지만 집사는 7명으로 충분했다. 집사라는 직분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이며, 그 자격도 사도행전을 보면 만만치 않다. 내가 정말 집사로서 혹은 일꾼으로서 일을 하고 있는지 혹은 그런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고, 그러기에 부담이 가고 그냥 ‘형제’로 불리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말 번역에는 정확하지 않지만, 원어에서는 이 구절이 “이 (교회) 때문에 너희 안으로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가정법을 따라 집사가 되어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루려 함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 ‘가정법’은 하나님의 집의 법을 말한다. 교회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교회 즉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룰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가정이 되는데, 이 큰 집이 운영되는 모든 절차가 바로 ‘가정법’이다. 이 단어 ‘오이코노미아’는 가정이라는 뜻의 ‘오이코스’와 법이라는 뜻의 ‘노모스’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우리 말 번역에서 ‘청지기’라는 단어로도 번역되었고, 같은 단어는 에베소서에서 ‘경륜’으로도 번역되었다. 국어 사전에서는 ‘경륜’이 ‘일정한 포부를 가지고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또는 그 계획이나 포부’라고 정의 되었는데, 결국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을 해 나가는 모든 절차를 말한다. ‘일꾼’ 혹은 ‘집사’는 이러한 것을 맡은 사람으로서 특히 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특히 음식을 나눠주는 것에 게을리 하게되면 사람들이 굶게 된다 (마 24:45). 바울은 이러한 일에 감옥에 매인 상태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6-27절 – 그러면서 드디어 이 ‘가정법’의 근본인 이 ‘비밀’에 대해 열어주는데, 이것은 비밀이라 만세와 만대를 지나도록 감추어졌었지만,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밝히 계시되었다. 이 ‘나타났다’라는 말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27절에는 드디어 확실히 말한다. ‘하나님이 이 비밀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려’하셨는데, 이 ‘알게 하려함’은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즉 이방인 혹은 열방 가운데 이 비밀의 영광이 풍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너희들 안의 그리스도’이다. 이 ‘안’이라는 단어는 믿는 이들 각 사람 속의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너희’가 복수이므로 우리들 관계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눅 17:21).
골로새의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아마 숨이 넘어가는 감격이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비밀은 숨겨져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 계시고 영광이 충만했다. 그들 자신은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 되신다. 곧 복음이 ‘그리스도’이고, 우리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되신다.
28절 – 그래서 바울을 비롯한 일꾼들인 ‘우리’는 경륜에 수고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해서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권하다’는 뜻은 ‘권하다’ 혹은 ‘경고하다’ 혹은 ‘북돋워 주다’의 뜻이 있는데, 이러한 사역은 결국 각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다. ‘완전한’은 ‘성숙한’의 뜻인데, ‘완성하다’ ‘장성하다’의 뜻이 있다. 즉 각 사람에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엡 4:13).
29절 – 이러한 가정법을 이루기 위해 바울은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는데, 개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다.
주님, 나의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사역하려는 시도를 멈추게 하시고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를 바라보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주께서 역사하시면 그 역사를 따라 내 있는 힘을 다하여 충성하는 그러한 사역하게 하소서. 주님의 가정을 돌보게 하시고, 나의 가정이 주님의 가정이며, 교회가 주님의 집임을 알게 하시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사역을 배우게 하소서. 내게 나눌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