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중 간첩 같은 것도 이중적이지만, 미국에 이민와서 언어 문제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지위적 자격의 박탈감,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와서는 일을 찾을 수 없어 마켓에서 일하거나 페인트 혹은 리커 스토어와 세탁소 등 육체 노동을 하는 등의 일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고통을 줄 수 있는 문제다. 우스갯소리로 낙타 새끼가 어미에게 자신의 각 부분의 생김새는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모든 대답은 ‘사막의 환경을 견디기 위해서’ 였지만 그의 물음은 ‘그런데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 하는 것과 같다. ㅋㅋ
신약의 2/3를 쓴 바울도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경험했다. 보내는 편지마다 자신의 사도됨을 누누이 변호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과거는 주님께 용서 받았지만 그 자체는 지울 수 없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박해했던 그 전과는 계속 남아 있음을 알았음은 물론 자신의 육적인 기질에 대해 항상 싸우는 죄인 중의 괴수, 그리고 피흘리기 까지 싸우는 삶을 살았고, 온갖 고통과 고문과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동시에 하늘의 무한한 영광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나누며 기적까지 행했던 그의 삶은 어찌 보면 모순적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더우기 수차례 전도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세우고 제자를 양육하며 많은 기적을 행하는 등 놀라운 사역을 했지만, 그의 말년에는 많은 이들 특히 그가 기대하던 데마는 오히려 세상을 사랑해서 그를 떠났고, 기대와 다르게 바나바와 다투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문제의 마가만 그에게 남는 아이러니한 말년을 보내고 전설에 의하면 다 늙어 순교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삶을 생각해 보면 세상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사역자로서도 (크리스천이 모두 사역한다는 전제 아래) 그의 삶을 그리 따르고 싶지는 않다. 특히 말년에 쓸쓸이 살다가 순교당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하긴 평생을 목회하다가 은퇴하고 나서는 별 노후 대책이 서있지 않은 많은 이들은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싼 음식이나 무료로 제공하는 한 끼를 위해서 배회하고 있는 일이 지금도 허다하다…
골로새서를 어제부터 시작하기에 골로새서 전체를 한번 다시 훓어 보니 위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계시가 있지만 동시에 교회의 문제점도 드러나는 면도 담고 있으며 더우기 바울이 이 서신을 쓴 곳은 ‘매인 (4:18)’ 곳 즉 감옥인 것을 알게 될때, 많은 감정이 교차된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천은 구원받고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와 졌지만 동시에 또한 현실에서 많은 것에 매였음도 본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매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죄책감도 있다. 시간을 의미있게 쓰지 않으면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며 (4:5),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데 돕지 않으면 또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그의 능력을 구한다. 그리고 동시에 온전한 죄사함을 위해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능으로 돌이킨다. 평화와 싸움이 공존하는 삶을 사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동시에 거기에 맞지 않게 별 열매를 맺지 않고 또 하루를 지나는 일상을 보며 처절히 갈등하는 이중적인 삶이다.
1절 – ‘바울’은 ‘사울’이 개명한 이름이다. ‘사울’이 히브리 이름인 반면 ‘바울’은 라틴 이름이다. ‘작다’ 혹은 ‘겸손하다’라는 뜻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바울은 그의 이름도 글로벌하게 바꿨다. 그는 사도의 자격, 즉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행 1:22)’ 라는 틀을 넘어 주님께서 친히 사도로 세우셨다 (롬 15:16-18, 고후 12:12).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사도직에 많은 의심을 했고, 그로하여금 두고두고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디모데’는 ‘티모 떼우스’라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의 뜻이다.
2절 - 이 편지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성도’는 ‘성인’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saint’다.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모든 신실한 형제들은 ‘성인’들이다. 원어에서는 ‘거룩한 (하기오스) 그리고 믿는 (피스토이스) 형제들’이다. ‘은혜와 평강’은 유대인의 인사인 ‘평강’과 그리스도인의 누림인 ‘은혜’를 합한 것이다.
3절 – 바울과 디모데는 갇힌 몸이었지만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을 했고 또한 감사했다.
4절 – 감사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다. 믿음의 이유와 기준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다.
5절 – 그런데 결국 4절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의 원인인 골로새 성도 자신들을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인데, 이것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즉 성도들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가능케 한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다.
6절 – 그래서 복음을 설명한다. 계속 점진적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 바울의 문체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골로새에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더우기 어떤 다른 ‘사도’가 전한 것도 아니다. 그 복음은 ‘이미 너희에게 이르’게 된 복음이다. 복음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전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세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데, 그 결과는 깨달은 날부터 바로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한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 자라게 하고 또 복음을 맺게 한다.
7절 – 에바브라 라는 인물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이름만 언급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우리와 함께 된 노예 (원어는 한 단어, 즉 동역자)’로 그의 권위를 격상시킨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종들은 ‘종님 혹은 노예님’이 아니라 함께 노예된 동역자들이다. 그 어떤 이들도 다른 이의 위나 아래에 있지 않고, 서로 복음에 빚진 자들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빚을 갚는 노예들이다. 골로새 성도들은 이 에바브라에게 제대로 복음을 듣고 배웠다. 그래서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 된다.
8절 – 에바브라는 혼자 사역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사도들에게 보고하고 그들과 함께 나눴다.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함께 노예된 이들’과 사역을 나누었다.
9절 – 결과적으로 바울과 디모데의 기도의 사역을 얻게 된다. 신실한 노예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듣던 날부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구했는데, 9절-12절이 그 기도의 주된 내용이다. 첫째로 ‘모든 지혜와 영적인 총명 (understanding) 안에서 그 분의 지식으로 채움받 (원어)’ 는 것이다. 이 ‘지식’은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로 단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온전히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10절 – 깨달으면 해야할 것을 알게 된다. 1. 주의 기쁨을 위해 2. 모든 좋은 일에 열매가 가득하며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는 것이다.
11절 – ‘하나님의 영화로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강함으로 힘있게 하시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랜 고통에 이르게 하시고’ 이 구절은 다시 한번 크리스천 삶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능력은 이 세상에서 멋진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랜 고통’을 위한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음이 결코 이 짧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절 –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각 지파의 땅을 받은 것 처럼 ‘부분’을 얻기는 하지만 조그만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놀라운 기업이다. 그런데 결국 기도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 거하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난들을 통과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다. 이것도 크리스천의 이중적인 모습이다.
13절 –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 안으로 옮기셨’다. ‘옮기다’의 ‘메테스테센’은 위치적으로 옮긴 것이다. 즉 우리가 잘 나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분의 은혜로 우리는 옮겨졌다. 옮겨지기 전이나 후나 우리의 어떠함이나 상황은 똑같다. 하지만 위치적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또 다른 이중적인 모습이다.
14절 – 원어에는 ‘그 안에서 그의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의 구속함을 얻었다’ 즉 우리가 구속 (혹은 속량) 받은 것은 주님께서 그의 피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신 것이다. 이 ‘속량’이라는 단어 ‘아폴루트로시스’는 ‘몸값을 지불하고 놓아주다’ 즉 ‘구하다, 구속하다’의 뜻이다. 죄로 인해 어둠의 권세에 잡혀있던 이들의 몸값이 그리스도의 피로 지불되고 다시 사온 바 되었다.
15절 –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즉 현현이고 체현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차원이 다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시는,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한 것은 ‘모든 창조물의 첫번째’라는 뜻인데, 이 첫번째 ‘프로토토코스’는 ‘프로토스’ 즉 첫째 라는 말과 ‘틱토’ 즉 ‘낳다, 생산하다’의 뜻인데, ‘프로토타입’처럼 마치 차를 만들 때 먼저 처음 만드는 프로토타입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주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함께 하신 ‘말씀 (요 1:1)’이셨고, 그 안에 만물의 DNA가 존재함으로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지어진 프로토타입이시다.
16절 –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정사’로 번역된 ‘아르케’라는 단어는 ‘처음’이라는 단어와 같은데 즉 보이는 세계가 창조되기 전 먼저 창조된 영적 존재들인 천사나 데몬까지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가 되었었다.
17절 – 그리고 그 분은 만물 전에 계시고, 만물이 그 분과 함께 섰다. 이러한 이상은 죄로 망한 그리고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우주를 보면 볼 수 없지만, 구속되고 새롭게 창조된 우주를 보게 될 대 믿음으로 보이는 이상이다. 이것도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양면성의 실체이다.
18절 –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다. 교회를 몸이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한 것은 교회는 함께 가는 공동체요, 그를 성장하게 하고 이끄시고 명령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본일뿐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기 때문에 친히 만물과 산 자와 죽은 자의 으뜸이 되신다.
19절 – 아버지께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20절의 ‘기뻐하신다’. 거하는 것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모든 충만이 가능한 것은 20절이다.
20절 –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들과 화목 (reconcile)되기를 기뻐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를 흘려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놀랍지만 기본적인, 또 기본적이지만 놀라운 복음을 설명하는데, 이미 복음을 받고 그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골로새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것 같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지 되짚고 넘어가는 것 같다.
주님, 이중적 성격이나 양면적인 현실에 대해 항상 그리스도를 추구함으로 그 부유함을 누리기 원합니다. 한면은 고난 받고 실패한다 해도 다른 면은 그 실패와 고난을 넘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게 하소서. 아버지의 기뻐하심이 화목함을 통해서 나타남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당당히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