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주를 앙망하는 것 즉 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고, 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있고 올바르지 못한 교역자나 교인들을 보면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너머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과 촌장의 유명한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 중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라는 구절이 있다. 세상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기 때문에 기쁘고 신나는 노래보다는 사실 슬픈노래를 부르는 때가 많아야 한다. 7080 운동권에서 많이 부르던 노래들이 그런 류이겠다. 그런데 요즘은 슬픈 노래를 들어도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다. 7080 세대가 살아왔던 때와 비교해서 요즘 세대는 슬픔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요즘은 정신없이 빠른 리듬과 관능적인 춤을 겻들인 노래들이 훨씬 많고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이 화려하고 부유한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 시선을 잡아서 그런 것들에 한 눈 팔도록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지만 이제 주님께 눈을 돌리면 슬픈 것은 내 죄 때문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어떠함을 보는 것이 슬픈 것이다. 이 세대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슬픈 것이고, 내가 거기에 대해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는 무기력함이 슬프다.
하지만 슬픈 것에 머무르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오히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살전 5:16의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권유가 아니고 명령이다. 기뻐할 만한 상황에서 기뻐한다면 굳이 명령이 필요 없다. 하지만 슬픈 노래가 많은 이 세상에서는 적극적인 기뻐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뒤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즉 주님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그러면 18절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 오늘 주님을 바라봅니다. 적극적으로 기뻐합니다. 세상 오락에서 기쁨을 구하거나 나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봄으로 참된 기쁨을 구하기 원합니다. 영 안으로 깊이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