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박해해서 심히 깊은 구덩이에 던져진 선지자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지자가 박해 받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변호하려 한다든지 정치나 권력에 빌붙는다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춘다든지 하는 것은 참된 선지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역시 그의 원통함을 주께만 호소하고 주께서 그 모해하는 자들을 저주해 달라고 기도한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전하거나 혹은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서 자신의 안위와 더러운 이를 탐하고 결국에는 사탄의 종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그에 비해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선지자들은 역사를 통해 핍박 받아 왔다. 이는 율법 시대나 그 전 시대에도 그랬지만, 소위 은혜 시대라고 하는 요즘도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선지자들은 있어서 요즘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선지자의 위치일 것이다. (고전 12:28, 29, 고전 14:37, 엡 2:20 등) 구약 시대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큰 두 기둥이었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약 시대 특히 광야에서 시험받던 시기처럼 율법이나 하나님 말씀을 범한다고 바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즉 죄를 지어도 바로 벌을 받거나 죽음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은혜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러한 정의는 은혜 시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별 제재가 없는 시대가 은혜 시대가 아니라, 그러한 죄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미친 것이 은혜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엄중히 경고한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찍혀버린 사건은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1, 22)”
그러고 보면 이 은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그의 뜻에 따라 살면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것 아닐까. 이것이 참 선지자의 모습이고 참 신자의 태도가 아닐까. 위로는 위로 받을 만한 이가 구하고 위로 받을 만한 이에게 임한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도 주님의 뜻 때문에 박해 받을 때 가능하다. 주님, 주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