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에카는 슬픔의 노래, 즉 시가서이다. 히브리시가서 특성상 시같이 들리지 않는다. 영어시나 중국시는 확연히 음율과 라임(마지막 단어의 운)이 있어서 한눈에 봐도 노래같이 느껴지는 반면 한국어 시나 히브리서 시에는 라임을 만들기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요즘은 가요계에서 한국어 노래에도 라임을 넣으려는 시도가 있지만 간단하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히브리서 시는 많은 경우 대조되는 문장이나 반복구를 사용해서 시로 만든다.
30년 전 미국에 와서 접했던 CCM, 그리고 그 중에 많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였다.
주의 인자는 끝이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 가사는 처음보면 시편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정도로 여호와께서 매일 아침 창틀에 햇살이 비추는 상쾌하고 아름다운 아침을 주시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나중에 보니 애가의 한 부분이었다. (물론 시편의 노래들도 상황을 초월한 것이 많다.) 더우기 몇 장 앞에는 어미가 자신의 아이를 먹어야만 할 정도로 악한 상황을 얘기하고 또 바로 전에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허리에 화살을 쏘셨다고 말한 후라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말씀같이 느껴진다. 어제 잡아 먹은 자신의 아이가 살아서 돌아올 것도 아니고 그 아프고 죄스러운 기억도 뚜렷이 남아있는데, 예레미야는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노래한다.
22절의 영어 번역은 ‘It is of the LORD's mercies that we are not consumed, because his compassions fail not.’이다. 주님의 자비가 그치지 않기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가 진멸당하지 않는다. ‘자비’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기 때문에 항상 동일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에 주의 백성이 진멸 당하지 않는다.
이 ‘긍휼’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지만, ‘은혜’라는 말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좀 더 이해가 된다. ‘은혜’라는 말 안에 자비와 긍휼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 ‘긍휼’이라는 말은 좀 특이한 단어인 것 같다. 벧전 2:10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씀한다. ‘은혜’라는 개념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긍휼을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지만 받은 것인 것 같다. 자격이나 위치나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로서 특별히 한 일이 없지만 받았다면 은혜이고,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긍휼로 여겨진다. 즉 긍휼이 더 깊이 더 멀리 미친다.
평상시 평화로운 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산다면 하나님의 은혜지만, 고통의 때를 통과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긍휼하심으로 인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의 자비와 긍휼을 노래하며 계속해서 주님을 찬양한다.
믿는 이들은 주를 앙망하고 그에게 구해야 하며, 그런 이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다라고 선포한다. 주님은 주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고생과 근심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즉 매일 아침 새로우신 주의 인자와 긍휼을 바라보며 새롭게 주님을 경험해야 한다.
주님, 어제와 비교해서 별 차이 없는 오늘 아침이고, 몸도 마음도 무겁고 피곤할 수 있지만, 매일 아침 주의 성실하심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주의 긍휼하심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 부드러운 주의 자비의 손길을 이 시간 느끼고 주의 사랑 안에 빠지기 원합니다. 힘 되시고 생명 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pnsnJzTsA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