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단지 2600년 전에 유다에 일어났던 슬픈 사건이라고 여긴다면 그냥 옛날 역사의 기록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참상은 요즘도 일어나고 있고 특히 IS의 만행으로 어린이들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고 있고 북한의 기독교 탄압을 생각해 보면 단지 옛날 이야기로만 끝날 것이 아님을 안다. 현재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이 안전하고 별 걱정이 없을지라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다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많은 참상을 불러왔고 그렇게 된 이유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겠지만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선지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고,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본 것이다 (14절). 이 선지자들은 ‘네 선지자들’ 즉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선지자라고 스스로 일어나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이 아닌, 헛되고 어리석은 것을 보고, 거짓 경고 (문자적으로는 거짓된 짐) 그리고 미혹하게 할 것 (추방의 원인) 을 백성들에게 줬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선지자들이 과연 맞는가 분별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1)』
요즘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종교적인 선지자요 다른 하나는 미디어 선지자들이다. 종교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못 전해서 소위 말하는 ‘번영신학’을 가르치거나 이단적인 교리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고, 또한 뉴스를 통해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들을 쏟아놓은 후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 드러나면 아무런 언급도 책임도 지지않는 미디어 혹은 소위 ‘전문인’ 들이다.
하지만 과연 ‘보통 믿는 이들’이 어떻게 이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좋은 목자 혹은 선지자들을 만나는 것은 가장 복받는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좋은 목자와의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의 어떠함을 말해줄 수 있는 척도다. 내가 속으로 세상의 영광과 안위를 원한다면 번영 신학을 말하는 선지자를 좇을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온전히 좇기 원한다면 십자가의 메시지를 달게 들을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 항상 읽고 듣고 연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던 베뢰아 사람들 같이 (행 17:11)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고,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과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 (17절)과는 전혀 다른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준비였을 것이다. 즉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국방 증강이나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무시하고 사람의 방법만으로 자신을 지키려 한다면 그 결과는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먹을 것을 달라면서 죽어가는 오늘 말씀과 같은 참상이다. 그래서 시편 127:1에서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씀한다. 물론 국방에 소홀하면 안되고 외교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달렸다.
주님, 주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분명히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도 과연 그런 음성이 들린다고 내가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까 의심도 됩니다. 오직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압니다 (히 1:1-2). 우리 안에 분명히 보여주시고 주님을 따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다만 주께서 말씀하시고 정하셔야 하오니 주님 이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옵소서. 주의 말씀하심을 통해 오늘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