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오락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한 적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여러 매개체를 통해서 언제든지 웃고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학생시절에는 버스를 기다리며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 스마트폰으로 항상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되다보니 정작 말씀을 묵상하거나 의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물론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말씀을 읽을 수도 있고 설교를 들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성향이 의미를 좇는 것 보다는 즐거움과 오락거리를 좇는 것이 훨씬 강해서 슬픔 보다는 웃음거리, 더우기 유치한 것들을 보며 즐긴다.
오늘 말씀 역시 1장 처럼 ‘슬프다’로 시작된다. 주위 모든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슬프다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 가운데 상대적인 기쁨과 희망을 발견한다. 배부를 때는 그 어떤 훌륭한 음식도 맛이 없지만 정말 배고프면 딱딱한 빵도 맛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며 유월절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명하셨는지 알겠다. 미국이라는 나라,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먹을 것에 대해서 만큼은 그래도 걱정없는 나라에서, 먹을 것이 해결되면 보통은 쾌락을 찾게 되지만, 시간 시간 주님을 찾고 그 가운데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한 애통이야말로 그 어떤 오락이나 감동으로도 얻을 수 없는 엔돌핀이나 다이돌핀 등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홀몬을 생성하고 있지 않을지 궁금하다.
1장의 말씀이 일반적인 심판의 모습을 설명했다면 2장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많은 도성들과 사람들 그리고 왕과 제사에 연관된 사람들과 더불어 특히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이 있다. 1절에는 ‘그의 발판 (footstool)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라고 말하는데, ‘발판’은 성막 혹은 성전을 가리킨다. 다윗이 역대상 28:2이 말했던 것이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올린 기도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발판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4절에는 시온의 장막 (성막)에 노를 불같이 쏟으셨고, 6절에는 ‘그의 초막 (성막)을 동산이었던 것 처럼 허물어 버리신다. 구약의 모든 중심은 성전인데 성전이 허물어졌다.
이것은 사실상 유대교의 종말을 뜻한다. 구약의 최종단계가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성전 파괴의 사건이 하나님 그 분 자신의 종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시다. 성전이 파괴됐다면 보이는 성전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이사야 66:1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고 말씀하며, 신약에 와서는 분명하게 계시가 되어 고전 3:16에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됨을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 11:30)』 이스라엘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의 구원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주님, 슬픔없이 재미와 쾌락만 찾으려니 오히려 불만만 많아짐을 봅니다. 주께서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주셨을 때 믿음으로 통과하며 애통하고 회개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노래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