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는 ‘에카’라서 시작부터 슬픔이 가득하고 죄와 심판에 대한 언급이 많아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다.
오늘 말씀 18절의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는 선포는 ‘하나님은 맞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특히 바로 뒤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는 '나의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이 왔으니 여호와는 의롭습니다 (You are right!)' 라는 뜻이다. 나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내가 뭘 잘 못했다고?’ 라고 한다면 여호와와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인간은 타락하면서 부터 근본적으로 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기준인 율법을 주셨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그의 말씀을 지켜야 했지만, 모두 그릇된 길로 나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일부러 잊었다. 그러면서 ‘신이 있다면 왜 이런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가?’ 라고 이런 저런 상황과 사건에 대해 불평하고 푸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은 무조건 자신의 편에 서서 자신의 바람과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 존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의 시간을 주시고, 인간은 그 고통을 통과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고통의 시간이 올 때 그 어디라도 기댈 곳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자들’ 즉 동맹국 이집트와 주위 몇 나라들도 바벨론의 눈치만 보고 원래 약속했던 지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다를 이용해 먹는다. 모든 길이 막히고 소망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여호와를 기억한다.
아주 오래 전 봤던 영화 ‘사관과 신사’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교관이 사관 후보생에게 힘들게 훈련시키면서 포기하고 나가라고 강요할 때, ‘나에겐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눈물로 외치는 장면이다. 그 사관 훈련생에게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서 고통은 은혜의 또 다른 면이다. 내 속을 들여다 보고 달려왔던 길을 잠시 멈추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며, 내가 정말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다시 깨닫게 되고, 내 속을 정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전체를 보면 그 상황과 내용은 멸망과 심판같지만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고통을 통과하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고 여호와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고통을 받은 다른 이들, 제사장과 장로들은 그 내면이 정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기 보다는 음식을 찾기에 급급했다. 아마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셨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떠났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여호와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무기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염치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합 3:2) 여호와를 다시 찾아야 했다. 여호와 외에는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찾을 수 있는 분도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주께서 치셨지만, 결국에는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을 바랐다 (22절). 주께 다시 돌아가는 것, 주를 다시 찾는 것, 이것이 나의 속이 정화되는 첫 걸음이다.
주님, 나의 죄와 어떠함을 생각하면 주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염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나를 맞으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갈 곳 없고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오늘 주와 꼭 붙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