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사람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보물과 먹을 것을 바꾼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목숨과 혹은 가진 모든 소유로 바꾸어도 모자라는데, 단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가치있는 것들을 포기한다.  이스라엘이 그런 상황이 되었다.  나와 나의 가정과 한국 교회가 그런 상황은 아닐까...

안전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또는 세상 혹은 현재의 대세와 더불어 마찰없이 지내기 위해서 보배를 팔아넘길 것인가?  애가는 그 모든 환난과 유리와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한다 (5절 8절).  그런데 그 죄 중에 아마도 죄를 계속해서 그냥 간과하고 놔둔 것이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9절은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매일 두루마기를 빠는 말씀이 생각난다.  아.. 정말 회개란 매일 해야하고 십자가도 매일 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금방 죄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리고 죄의 쾌락을 위해 보물을 기꺼이 팔아 넘겨 버리게 된다.

오늘 말씀과 상황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 고후 4장이다. 특히 7절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며 질그릇 같이 천한 모양의 우리지만 우리 삶이 가치와 능력이 심히 큰 것은 그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이어지는 8절부터 10절까지는 사도들이 마치 애가에서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받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기꺼이 짊어지고 감수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능력은 바로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 안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배'라는 단어 θησαυρός는 재미있는 단어이다.  그냥 '보화' 혹은 '보석' 자체가 아니라 그런 귀한 것들을 모아놓은 또 하나의 보관함이다.  하지만 이런 단어가 익숙지 않아서 영어도 한국어도 그냥 '보배'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보고’라는 단어도 있다.  아무튼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바꾼 보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지만, 정작 우리 안에 있는 보물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보화 즉 그리스도 주님이시요, 그를 모신 θησαυρός가 곧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주님, 가장 귀하신 분을 천한 땅의 것이 소유했습니다.  나의 더러움 때문에 주님의 순수함을 가리는 죄를 용서하시고, 오늘도 두루마기를 빨며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하소서.  마음을 지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