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마지막 장을 읽으며 다시 처음 1장 말씀을 생각해 본다. 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 (1절), 이 말씀은 그냥 읽는 것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켜야 하는 책이다 (3절).
1절 - 천사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요한에게 보인다.
생명수 혹은 생수의 강이라는 말은 계시록 7장 (생명수 샘), 21장 (생명수 샘물), 그리고 마지막 장 1절과 17절 (생명수의 강, 생명수) 등에 나오는데, 샘으로 나오던 생명수가 이제 강이 되어 흐른다. 발원지는 샘이지만 그것이 강이 되었다. 강이 흘러 모든 것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한다. 그 모습이 수정 같이 맑아서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생명 그 자체다.
요한복음 7:38에도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며 믿는 이들이 받을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때 생수의 강은 복수여서 '강들'이다. 성령이 주님을 믿게 하셔서 생명을 주시며 충만하실 때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듯이 각 사람이 주님을 믿을 때 생수의 강들이 터져 흐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적신다.
그런데 여기 마지막 장의 생수의 강은 단수이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서 온 땅을 적시는 한 줄기 강이다. 창세기 2장에는 에덴 동산에서 강이 흘러 나와서 갈라져 네 강으로 된 것을 보여준다. 강이 네 개 같지만 원래 그 발원은 하나 즉 생명의 샘 주님이시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역시 둘이 아니라 하나 즉 단수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이 한 분이심을 말씀한다.
2절 -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로 번역됐는데 강은 남성격이지만 '그 한 가운데'를 묘사하는 말의 '그'는 여성형이므로 여기의 가운데는 강이 아니라 생명 나무를 묘사하는 말로서 '그녀의 (새 예루살렘) 큰 길 중간과 강 이쪽 저쪽에 생명나무가 있는' 것을 설명한다. 창세기에도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가 있었고, 그 동산을 발원해서 나가 강들이 갈라진 것을 보여주는데 역시 새 예루살렘 성도 중앙에 생명 나무가 있고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강 좌우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 '나무'라는 단어가 좀 특이하다. 계시록 재앙 중에 풀과 함께 태워진 나무들은 δένδρον라는 단어로 일반적인 모습의 나무다. 그런데 여기 생명 나무에서 쓰인 단어는 몸통과 가지와 앞사귀 등의 모습이 있는 일반적인 나무가 아닌 오히려 그냥 '목재'에 가까운 단어인 ξύλον ('ㅋ슬론, 발음도 어렵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9번 나오는데 많은 부분 주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나무)를 가리킨다. 즉 생명 나무는 그 본질이 주님의 십자가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진정한 생명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생명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
그런데 보기에는 죽은 것 같아 보이는 이 목재 같은 '나무'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처럼 살아 있다. 매달 열매를 맺는다. 개정에도 그렇고 킹제임스 역시 12종류의 열매를 맺는다고 번역했는데, 원어에는 12종류가 아니라 달마다 한 열매씩 12열매를 맺는다는 뜻 같다. 달 마다 다른 열매가 아니라 같은 열매를 매달 하나씩 맺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수가 흘러 생명 나무에 열매를 맺히게 하기 때문에 그 열매 역시 생명이 풍성한 사랑일 것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맺게 하신다.
그 열매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매 달 맺히는 그 열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풍성이요 생명이시며 믿는 자들의 만족과 상급이 될 것이다. 천 년 왕국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믿는 이들이 주님의 생명으로 풍성함을 영원히 누리고, 이것은 다함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열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다. 이 무슨 말인가... 전 장에는 물론 '구원얻은 만국'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만국'이다.
계시록이 처음 정경에 포함되는 문제가 컸다고 한다. 내용의 난해함도 그렇지만 '영원한 복음'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도 발견되는 '만국'의 언급 등에 문제가 있었다. 즉 예수 믿어야만 '천당가는' 일반적인 복음의 가르침에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만인구원설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구원'이 무엇인가, 그냥 단지 지옥신세 면하고 천당가는 것인가, 아니면 '이같이 큰 구원 (히2:3)'에는 무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생각한다면 음부에까지 미치는 주님의 은혜를 간과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더이상 아프고 눈물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치유'가 필요한 '만국'이 있다는 말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전히 성화된 성도들은 더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 나무의 잎사귀로 치유가 필요한 이들이 새 땅에는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면 머리 빠른 이들은 생각한다.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 주님을 위해 살고 목베임을 당하는 것 보다 그냥 주님 믿지 않고 '만국'의 일원으로 영원히 치유받으며 사는게 낫겠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고 그러한 것이 2절에서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사람들에게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고 그 풍성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것과 수시로 치료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삶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3절 - 그 때는 다시 저주가 없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 (단수)가 그녀 (새 예루살렘) 가운데 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여기서 '섬긴다'는 단어는 λατρεύω라는 말로 거룩하게 예배하는 모습이다.
4절 - 이 종들이 예배하며 섬기는데 그들은 단순한 종들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기 때문이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한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조차 하나님의 앞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뒷모습을 잠간 보았지만, 이제 그의 종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그대로 본다. 두렵고 기쁜 일일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신 하나님을 그의 계신 그대로 본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의 종들이 하나님과 동일하게 거룩해져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자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심으로 그 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와우, 정말 놀랍다! 더우기 하나님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나 그 종들을 보는 다른 이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예수가 하나이듯, 이제 하나님과 그의 종들이 하나임을 알게 한다. 다른 것이 영광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영광이요 참된 구원이다!!!
5절 - 다시 밤이 없다. 그러니 잠도 없겠지. (그래서 만국은 치료가 필요한가?) 물론 등불이나 햇빛도 필요 없다. 태양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 햇빛도 그 빛을 잃는다. 주 하나님이 그 종들에게 비취신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토록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6절 - 이러한 언급이 너무나 상상을 초월해서 어안이 벙벙한데, 주님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것들을 보이시려고 메신지를 보내셨다.
7절 - 생명수의 강을 보이는 '그'는 21장 9절의 일곱 천사 중 하나일텐데,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한다. 분명 천사는 부리는 영 (개정에는 '섬기는 영' 히 1:14)이지만, 메신저로서 말씀을 전하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므로 주님을 대변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라고 말씀한다. '보아라, 내가 속히 오고 있다.' 이 말씀은 경고인 동시에 위로와 확신의 말씀이다. 속히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뻐하며 바라는 이들은 과연 정말 몇이나 될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 즉 이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8-9절 - 19장에서 실수한 요한은 또 같은 실수를 한다. 메신저의 발 앞에 또 경배하려고 한다. 아직도 1세기를 살던 요한의 머리 속에는 메신저의 거룩한 모습이 주님을 연상하게 했다. 주님의 얼굴을 그의 종들이 맞대고 볼 것을 아직도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섬기는 영'인 천사의 모습에 압도 되었다. 하지만 천사는 그것을 금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에 이른다 해도 오직 하나님만 경배받으신다. 그 외의 어떤 것도, 천사도 왕도 카리스마 있는 종들도 결코 경배받지 못하고 우주에 오직 단 한 분만이 경배를 받으신다.
10절 - 아닌게 아니라 그 메신저는 마치 주님처럼 말씀한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과 권세가 주의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 있다. 두루마리의 예언은 인봉되지 않았다. 때(카이로스)가 가깝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는 인봉되지 않았지만 감추어져 왔던 것 같다...
11절 - '불의를 행하는 자'는 계속 불의를 행하게 하고 '더러운 자'는 계속 더럽게 하고... 이 둘은 능동적 동사이다. 하지만 뒤의 '의로운 자'는 '계속 의로움 받게 한다' 즉 수동적이다. 의로운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결정되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기준에 의해서고 주님에 의해서 의로워진다. 주님이 의롭다고 칭하셔야 한다. 역시 뒤의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함 받게 하라'도 수동형이다. 그 누구도 거룩하지 않지만 오직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주님이 최고다!
12절 - 다시 말씀 하신다. '보라 내가 속히 오고 있다. 내가 (그에게) 줄 대가가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지불할 것이다' 주님은 절대 속이지 않으시고 속지 않으신다.
13절 - 거듭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완성, 처음과 마지막이다.' 주님은 모든 것이고 성경의 전부이며 우리의 목적과 소망이다.
14절 - '하나님의 명령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이들이 행복하다.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한을 얻을 것이다.' 즉 생명 나무가 믿는 이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문들을 통해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15절 - 21장의 부정적인 목록과 비슷한데 '개들'이 추가 되었다. (개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그런데 '개들'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정말 '개'지만 성경에서 개는 이방인들을 뜻했다. 구별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존재들이 바로 이방 즉 개였다. 주님께서 의롭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구별되지 못한 이들은 모두 '개들'이다. 안타깝게 '기독교인'들 중에도 '개들'이 있을 수 있다. (주여, 저로 신자되게 하소서!) 이런 이들은 성 밖에 있다. 그런데 성 밖에 쫓겨난다는 얘기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성 안에는 이런 이들이 없다는 뜻이다. 즉 14절에 대한 대조문이다.
16절 - '나 예수는 교회들(부름받아 나온 이들, 복수)에 이러한 것들에 대해 내 사자를 보내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와 자손, 밝고 이른 (시간적으로) 별이다' 주님은 다윗의 뿌리이며 동시에 그 족보에서 태어나신 자손이시다. 예언을 이루신 분이시다.
17절 - 성령님과 어린 양의 신부 즉 교회의 미래의 모습이 초청한다. 초청의 말씀을 듣는 자들 역시 초청하기를 명하신다. 목마른 자도 오게 하여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게 하여라. 내 자신의 정결하게 된 모습을 미리 보며, 그 거룩함 받은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을 초청하는 모습은 신비스럽다. 그래서 나도 다른 이들을 초청해야한다. 오라! 원한다면 생명수를 받는다!
18-19절 - 예언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에 난해하다고 혹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임의로 빼거나 더할 수 없다. 겸손하게 받아서 지켜야 한다.
20절 - 주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내가 속히 오고 있다' 요한은 답했다. '아멘! 주예수여 오고 계시옵소서!' (에르쿠, 쿠리에 예수!)
21절 -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자들에게 있다. 아멘.
결코 알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로 체험되어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모습 부끄럽지만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심히 죄된 존재지만 그 날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는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고 계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