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는 새 부대, 새 언약, 새 계명, 새 피조물, 새 사람 등 새롭다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계시록 21장은 새 역사가 시작되는 장이다. 그래서 '새 (καινός)'라는 단어가 많다. 그런데 이 '새롭다'라는 단어는 완전히 다른 새로움일까 아니면 바꿔지고 진보된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고후 5:17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지금 내가 아예 없어지고 다른 인격과 외형적인 모습으로 대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김새는 물론 혈액형도 변하지 않았고 나의 습관이나 지식 역시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면 성화될 것이지만 지금 현재 말씀이 선포한다고 내가 현실에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부활할 때에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겠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과는 별개의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새롭다는 단어 '카이노스'는 정하신 '때'라는 개념의 '카이로스'와 비슷하다. 헬라어 사전에는 이 둘이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너무 닮았다. 카이노스, 카이로스. 즉 일반적인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결정체가 이 카이노스 (새로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해아래는 새것이 없다. 왜냐하면 새것이라도 조금 지나면 더 이상 새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새것이라도 헌것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롭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말 헬라어 단어의 뜻처럼 전에는 아예 없던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뜻의 하나와, 또 다른 의미는 미래로만 흐르는 시간적인 개념을 넘어 그 퀄리티의 새로움 즉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성경말씀은 3,500년 전부터 쓰여졌지만 지금도 읽으면 새로운 것과 같다. 새로움을 주고 생명을 주고 도전을 준다. 사람을 살린다. 마치 몇 백년 전 베토벤의 교향곡을 오늘 들으면 그 웅장함이 새로운 것처럼, 그 곡은 오래된 것일지라도 오늘 연주하고 들을 때 새롭게 부딪힌다.

1절 -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는데 처음 하늘 처음 땅이 없어졌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처음과 나중이라' 또 '처음 사랑' 등과 같은 단어다. 여기에서는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이미 존재했던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정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물리적으로, 예를 들어 웜홀같은 것에 의해 삼켜져서 아예 사라진 걸까?

전도서 1:4 에 '...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재 지구가 새롭게 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 벧후 3:6-7에는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며 앞으로의 불심판을 받을 것이고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며 한 면으로는 완전히 바뀌는 하늘과 땅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새 하늘과 새 땅이 지구와 우주가 변한 것이든 아니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창조든 거기는 현재 상황과는 전혀 다를 것을 말씀한다.

바다에 대해서 창세기 1:10 에서는 지구면에서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이 지금보다 훨씬 적어서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바다가 없어진다. 물이 없어지려면 창세기 처럼 물이 지하수로 들어가거나 하늘의 궁창으로 올라가야 한다. 즉 다시 한번 큰 지각변동과 대기변동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 주님은 단지 5절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의 능력이다.

2절 - 이러한 새하늘과 새땅이 준비가 되자 드디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는데, 옛날 땅의 예루살렘과는 완전히 다른 성이다. 첫째로 사람이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성의 구성 물질은 하늘의 것이다. 성경에서 '천국'은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것'의 개념이 강한데, 바로 이 새 예루살렘은 그 마침이 된다. 이 새 예루살렘은 단장을 했는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같다.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있는데 여기에 어린 양의 신부가 등장하며 그것은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계시록 1장에 일곱 촛대가 교회들이었음을 말씀하신 것 같이, 이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임을 말씀한다.

3절 - 하늘에서 큰 음성이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장막이 인류와 함께 있고 그 분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그 분의 백성들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라고 하신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선민 유대인들과 함께 하시거나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거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셨는데 이제는 '인류'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물론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 사건과 동시에 불못에 타고 있는 심판받은 인류가 있다.

4절 -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닦아 주시고 죽음과 슬픔과 울음과 고통이 없어질 것이다.

5절 - 주님의 선포로 이 모든 것이 되어진다. 그런데 이 '보라'는 2인칭이다. 즉 주님은 요한에게 보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 말씀들 (로고스)이 참되고 진실 (백마 탄 분의 이름과 같은 단어)하므로 기록하라 명하신다.

6절 - '이루었도다'는 '되었다'는 말로 현재 완료형이기 때문에 '이루었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시작)과 마지막 (완성)'이시다. 생수의 샘에서 나오는 것으로 주님은 목마른 자에게 거져 주실 것이다. 이 '목마른 자'는 단수인데 주님은 많은 이들에게 한번에 물을 던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친히 물을 떠 주신다.

7절 - 다시 이기는 자 (단수)에 대한 초청이 있다. 물을 마시는 자도 단수고 바로 다음에 이기는 자도 단수다. 이기려면 생수의 샘에서 길어 마셔야 한다. 세상에 대해 목마르지 않고 주님으로 갈증을 해소해야 이길 수 있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는데, '나 (하나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상속받으려면 아들로 성장해야 하고 이것은 바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8절 - 반면에 다른 이들이 나온다. 이들의 묘사를 보면 불신자들을(요즘은 비신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여기서는 불신자로 써야할 것 같다) 
묘사한 것 같지만 계시록을 읽는 대상이 믿는 이들임을 생각할 때 히브리서의 여러 말씀처럼 우선 믿는 이들에 대한 경고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대한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δειλός'라는 단어인데 '무서워하는, 꺼려하는, 소심한' 등의 뜻이다. 신약에 단 세번 나오는데 두번은 풍랑을 만나 떠는 제자들에 대해 주님께서 왜 '두려워 떠느냐'라고 책망하실 때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도 두려워할 때가 있는데, 잘 생각해 보면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부활을 믿는다면 전혀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두려움에 대한 경고는 불신자 보다는 신자들에 대한 경고인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믿지 않는 자들을 언급하신다. 기본적인 신앙은 어찌보면 하나님 즉 절대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는데 그러한 것이 없다면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다.

'흉악한 자'로 번역된 단어는 'βδελύσσω'라는 단어로 어원이 '냄새나다'의 뜻이 있는데, 신약에 단 두번 쓰였고, 로마서 2:22에서 우상을 '가증히 여기'다 라고 번역되었다. 즉 가증하고 흉악하고 역겨운 일을 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단어와 달리 이 단어만은 과거 완료형으로 쓰였다. 그래서 '가증히 여김을 받은 이들'이다. 이미 과거에 하나님께 가증히 여김을 받은 이들이다. 아마도 사탄을 따라 그 위치를 벗어나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왜냐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에 대한 언급은 그 후에 없기 때문이다.

살인자들 행음자들 점술가들 (마약이나 마술 혹은 여러 접신 점술 등으로 미혹하는 이들 혹은 그러한 일에 관계된 이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쟁이들 (혹은 속이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것인데 이것은 둘째 사망 즉 육의 죽음인 첫째 사망 후에 오는 영원한 심판과 고통의 죽음이다.

9절 - 일곱 대접의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다시 나오며 요한에게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한다. 2절에는 '신부'였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함께하는 아내가 된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10절 - 영 안에서 그가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이끌어서 2절의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11절 - 하나님 영광으로 그 성은 빛이 났다.

12절 - 성벽이 높았고 12문이 있었고 그 문들에는 메신저(천사)가 있었고, 그 문들에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있다. 이 열두 지파는 앞서 십사만 사천의 열두지파의 이름과 같을 것이다.

13절 - 사방에 세 문씩 있어서 12문이다. 순서는 동북남서 이다.

14절 - 성벽에는 12기초석이 있는데 기초석 위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 이 중에 맛디아가 들어갈까 아니면 주님께서 친히 새우신 사도 바울이 들어갈까? 궁금하다. 그런데 이스라엘 12지파는 문인 반면 열두 사도는 기초석이다. 건물은 기초석이 없으면 건축이 불가능한데,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열두 지파가 먼저지만, 새 예루살렘은 그 기초가 어린 양 주님이심을 말씀한다.

15절 - 천사가 성의 여러 모습을 측량하려고 금갈대 자를 가졌다. 11장의 '지팡이 같은 갈대'는 '몽둥이 같은 갈대'여서 심판의 도구이지만, 이 금갈대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측량하기만을 위한 도구다.

16절 - 그 새 예루살렘성 즉 도시의 형태는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길이 너비 높이가 다 같은데 일반적으로 도시는 높이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이 도시는 높이가 있다. 그래서 정육면체가 되어서 각 면이 12000 스다디온이며 합하면 144000스다디온이 된다.

17절 - 도시의 높이는 12000 스다디온이지만, 그 도성을 둘러싼 성벽의 높이는 사람의 치수로 144 규빗 즉 약 66미터 정도의 높이가 나왔고 그 치수는 천사가 측량한 것이다.

18절 - 성벽은 옥이다. 그래서 빛을 발하면 아마도 초록색으로 푸르스름한 광채가 날 것 같다. 도성 자체는 정금인데 얼마나 순수하면 투명한 유리같은 금이라고 한다. 상상이 가질 않는다.

19-20절 - 12 기초석에 대한 것으로 각종 보석이다.

21절 - 12 문이 진주라고 한다. 진주의 모양이 아니라 각 문이 하나의 진주로 만들어져 있다. 도성의 길(단수)은 유리같은 깨끗한 금이다. 새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신부이며 교회라고 할 때, 믿는 이들의 최종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들이다.

22절 - 도성 안에는 성전이 없는데 성전이 하나님이 계신 건물이라면 3절 말씀처럼 그 안에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없다.

23절 - 도성 안에는 해와 달도 필요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시고 어린 양이 등이 되시기 때문이다.

24절 - 개정에는 '만국'으로만 되어있지만 원어에는 '구원받은 자 가운데 열방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그 도성의 영광의 빛으로 걸어다닐 것이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 도성 안으로 들여가고 있다. (현재 진행형)

25절 - 조선 시대처럼 고대의 도성은 문이 있어서 밤이 되면 통행을 차단하기 위해 문을 닫았지만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 성문들을 닫을 필요가 없다. 아마도 잠도 필요없어질 것 같다.

26절 - '사람들이'라고 번역됐지만 원어는 '그들이'이다. 24절을 되풀이 하는데 여기는 미래형이다. 즉 그들이 열방의 영광과 존귀를 그 도성 안으로 들여갈 것이다.

27절 - 8절이 복수로 쓰인 것에 비해 여기에서는 각기 단수로 쓰였고 현재 진행형이다. 즉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졌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열거된 자는 도성으로 아무도 못들어 (단수) 오는데, 모든 오염시키고 있는자와, 가증함과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는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서 '오염시키는'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평범한'이라는 단어이다. 갑자기 '평신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평범한 신도' 즉 평범하다는 것은 세속적이라는 뜻이고 이러한 이는 도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생긴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새 예루살렘의 크기가 매우 크기는 하지만 땅 전체를 차지하는 규모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 규모를 문자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풀어야 하는가? 땅 전체를 새 예루살렘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도성으로 들여 오는데, 그 의미에는 들락날락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25절의 열방도 마찬가지이다. 이 열방이 구원받은 열방이라면 그들과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열방은 구속받은 열방인가 아니면 단지 목숨을 건진 열방인가...

주님, 요한이 본 것을 계시록을 통해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 할찌라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하는 그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