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 ‘시온산’은 아마도 이 땅의 장소가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일 것 같다.  왜냐하면 3절에서는 십사만 사천이 보좌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큰 음악이 있고, 3절에서는 그 음악에 맞춰 십사만 사천이 새 노래를 부르는 형국이다.

이 십사만 사천은: (3-5절)

  1. 그들의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원어에는 ‘어린 양의 이름’은 없음, 아마 3:12 때문에 넣은 것?)
  2. 땅에서 속량받고 새 노래를 부른다.
  3.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힘을 받지 않고 순결을 지킨 자들이다.
  4. 어린 양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고 있는 자들이다.
  5.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속량함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단수) 다. (‘속한 자’는 원어에 없다.)
  6.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3절 – 속량받은, 문자대로 ‘사다’의 뜻인데 ‘땅’에서 사왔다.  즉 그들은 하늘이 출신인 천사나 24장로같은 영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아담처럼 땅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와 후손들이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고 사오셨다 (고전 7:23).

그들 외에는 새 노래를 배울 자가 없는데 그것은 천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배우다’는 말은 ‘경험함으로 습득함’을 말하는데, 단지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냄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으로 천사들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4절 – ‘더럽히지’ 라는 단어는 성경에 3번 나온다.  고전 8:7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즉 우상의 문제로 인해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과, 계 3:4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즉 삶 속에서 구별되지 못한 모습에 대조한 말씀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자들(복수)과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라고 했을까?  정상적으로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물론 영적으로 여자를 악한 자나 음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여기의 여자는 복수이며 the같은 단어가 빠져있기 때문에 특정한 인물은 아니어서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할 것 같다.  그래서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독신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진정한 독신은 ‘ 절대적’ 그리고  ‘순수함’이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어린 양과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선교사들은 훌륭한 분들이지만 선교지에서 항상 경험하는 가장 큰 도전은 가족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온전히 독신이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마 그래서 바울도 자신과 같이 되라고 한 것 같다.  물론 가톨릭 사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익은 열매의 ἀπαρχή 라는 단어는 처음 것을 구별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단수로 쓰였다. 즉 구약의 장자, 그리고 신약의 첫열매의 개념이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에 세번 (성령의 첫 열매, 처음 믿은 신자 등), 고전에 세번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중에 첫 열매가 되심, 처음 믿은 신자 등)에 나온다.  아마도 이 십사만 사천은 특별히 역사적으로 처음 발생한 성도들 아니면 처음 믿음의 성숙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이들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기는 자들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기는 자들이 역사를 통해서 십사만 사천은 훨씬 더 많겠지만.  약 1:18에는 피조물 가운데 믿는 이들이 첫 열매가 됨을 말씀한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5절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즉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church goers)은 아니라 온전히 성숙되고 서 있는자들임을 알 수 있다.  (약 3:2)

6절 –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복음전할 (문자적으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 영원한 복음의 대상은 ‘땅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민족 종족 방언 백성들이다.  즉 이 영원한 복음은 이제 더 이상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으로 거듭나고 구속얻고 성장하여 온전한 구원을 받는 복음이 아니라, 뒤 7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라는 복음이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7절 말씀처럼 이제 더 이상 악이 세상에 관여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 온전한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7절 – 영원한 복음의 내용이다.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창조주를 경배하라’이다.  이것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땅에 거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온전히 있게 되기 때문이다.

8절 – 둘째 천사 (메신저)가 뒤이어 말을 하는데 바벨론의 종말을 선포한다.  역사적으로 짧고 굵게 나타났던 바벨론은 그 영향과 모습과 비밀이 종말까지 미친다.  모든 나라들에 그 음행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해온 자 (여성, 단수)다.  강한자는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그는 음행의 본이 되어서 모든 다른 나라들이 그 음행을 따라하게 만들었다.  하나님 대신 돈 맘몬을 따르게 했다.

9-11절 – 세번째로 메신저가 나타나서 뒤이어 말하는데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고난을 당하고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누구든지’ 단수이다.  10절의 ‘그도’와 11절의 ‘이름표를 받는 자’ 도 역시 단수이다.  그런데 11절의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부분은 복수이다.  즉 표를 받는 것은 마치 각 사람이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 처럼 개인적인 문제이고, 그 결과 개인적으로 우상 숭배의 삶을 살다가 교회처럼 후에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우상 숭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이 뭐라고 완전히 주님과 끊어지고 영원한 벌을 받는 그렇게 큰 화를 당할까?  어찌보면 사람들이 표를 받은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표를 받는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모를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도무지 안중에 넣지 않기 때문이고, 이것은 창조주를 무시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나는 오늘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할 것인가?  얼마나 기도하지 않고 결정할 것인가…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결단의 마음을 주소서.

12절 – 아직도 땅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인내가 필요한데 이들에게도 짐승의 표를 받는 것에 대한 유혹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된다.   짐승의 표는 낙인으로 찍히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받으면 무를 수 없다. 

13절 – 결과적으로 믿음을 지키는 자들 즉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 대한 상급이 있는데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영원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며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과 대조해서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 수고는 κόπος 라는 단어로 ‘치다, 가슴을 치다, 고역을 하다’ 등의 뜻이다.  단순히 그냥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믿음 때문에 가슴을 칠만큼 어려움을 경험하는가.. 그렇다면 행복하다.  그들의 행위가 따르기 때문인데, 이 행위는 ‘ἔργον 라는 말로 행위 혹은 비지니스 직업 등의 뜻이다.  즉 그들은 정상적인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킨 이들이다.  올바른 믿음 생활은 자신의 일을 덮어놓고 도닦는 삶이 아니라 ‘밭을 갈고, 잠을 자고, 매를 갈고’ 하는 등의 극히 정상적인 삶을 주님 안에서 살다가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다.

주님, 제가 십사만 사천에 속할 자신은 없습니다.  아니,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속량받았음은 압니다.  그 속량받음, 주님께서 피로 대가를 지불하고 사 오셨음을 믿고 인정하며 정상적인 삶 속에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받는 행복을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주님 안에서 살고 주님 안에서 죽게되는 복을 주심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