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 첫째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다면 지금 이 또 다른 짐승은 땅에서 나온다.  바다를 이방으로 해석했다면 땅은 이스라엘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 짐승 역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모방하나는 짝퉁이다.  어린양이신 주님을 모방하는 어린양의 모습을 가진 짐승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가장한 종교적인 인물일 수 있겠다.  이 짐승은 용처럼 말한다.  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첫째 짐승이 용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받아 온갖 ‘비방하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어린양을 가장한 이 짐승도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를 가장했지만 하나님을 비방하는 인물이다.

12절 – 그의 권세와 하는 일은 먼저 짐승과 같은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짐승, 즉 죽었다가 살아난 이에게 경배하게 한다.  어린양도 그리스도고 죽었다 살아난 이도 그리스도인데, 각각 짐승이 두 모습을 모방한다.  하지만 먼저 짐승은 정치적 성향을 더 띤 것 같고 지금 짐승은 종교적 성향이 더 강한 것 같다.

13절 – 이 구절을 보면 더 분명해 지는데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하는 이다.  (만약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시스템?)

14절 – 이적을 행하는 목적은 미혹케 함이다. 결국 그 결과는 칼에 상하였다 살아난 짐승을 위해 이미지(형상, 우상)를 만들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15절 – 그는 능력을 받아서 짐승의 형상에게 영을 주는데 결과적으로 그 형상이 말을 한다. 그리고 그 형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모두 죽인다.  여기까지 내용을 보면 완전히 하나님의 하신 일을 모방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영)을 주어 사람이 인격체로 창조된 일을 모방해서 짐승은 처음 짐승의 이미지 (형상)를 살아 있는 것 처럼 만든다.  인공지능이 떠오른다. 

16절 –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인침’ 받지만 짐승은 표를 받게 한다.  ‘인을 찍다 σφραγίζω’는 단어는 ‘봉인’의 뜻으로 많이 쓰였고, 고후 1:22에는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지 믿는 이들에게만 쓰인 것이 아니라 후에 계 20:3 에 사탄도 인침받는 것이 나오고 그것은 물론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표’라는 단어는 χάραγμα로 도장으로 찍어내는 표나 문양 혹은 파내어서 새긴 문양을 말하는데 주로 말같은 짐승에게 찍힌 낙인을 말한다.  사탄은 사람들을 인격체가 아닌 짐승같이 취급한다. 

갈 6:17의 ‘예수의 흔적’에서 ‘흔적’은 ‘스티그마타’로서 고대 주인이 종의 몸에 인두로 지지거나 칼로 파서 자신의 소유권을 위해 만드는 낙인이다.  주인이 위대하면 종이 받는 ‘스티그마타’는 그 종에게 영광이 된다.  ‘인침’ 받는 것은 이마에 받고 스티그마타는 몸에 받지만 짐승의 표는 이마나 오른 손에 받는다. 

17절 - ‘인침’이나 ‘스티그마타’는 주님과의 관계를 위해 있지만 이 ‘표’받는 것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있다.  표 없이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경제활동 즉 매매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매는 단지 물건을 사고 파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transaction 즉 병원 방문이나 이동 혹은 여행 융자 등 거의 모든 사회적 행동을 포함하므로 표를 받지 않으면 많은 제약이 따르며,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큰 고통이 있다.  이 표는 부자들도 받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까지 남아있는 부자로서 이 표를 받지 않을 사람은 극소수겠지만 만약에 짐승의 정체를 파악해서 표를 받지 않는 부자가 있다면 풍족함에 익숙해진 삶은 그에게 큰 고통을 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야 견뎌내기 좀 더 쉽지 않을까..

원어에는 ‘표나 혹은 짐승의 이름이나 혹은 그의 숫자가 없으면 아무도 매매를 못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즉 이 표는 그 짐승의 이름이고 또 그 숫자라는 말이다.

18절 – 그것이 숫자이기 때문에 셀 수 있는데, 그냥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하고 생각이 있는 (총명한) 사람이 셀 수 있다.  즉 한번 보면 666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그런 표가 아니라 ‘세어봐야’하는 문제이다.  이 ‘세어보다’는 단어는 ‘ψηφίζω ‘ 라는 말로 조약돌 같은 작은 돌들을 가지고 하나하나 세어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고 지금처럼 편하게 숫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덧셈 조차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했다.  ‘지혜’는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마나 오른 손에 표를 받을 때 일반적으로는 그 뜻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면 사람의 수이고 그것은 666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단서를 종합해 보면 ‘짐승의 표’가 있고 그것은 짐승의 이름인 동시에 숫자이며, 동시에 사람의 수이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는 단수이다.  즉 666이라는 것은 사람의 이름을 나타낸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각 알파벳이 숫자로도 쓰였기 때문에 사람의 이름을 풀어서 세어보면 숫자가 나왔다.  그래서 로마에 불을 지른 것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의 이름을 풀면 666이 나온다.  문제는 네로는 계시록을 기록하기 약 20-30년 전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즉 주님 오시기 전에 네로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의 이름이 표로 기입되는데 그것을 풀면 666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영어도 알파벳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름이나 사물의 명칭을 숫자로 조합해서 666이 나오는 것을 꽤 많이 찾아 내었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베리칩이 666의 표냐 아니냐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지만 이러한 여러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중도의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 표를 받는 시기까지 지상에 남아있으면 너무도 큰 불행이기 때문이다.  베리칩이 반드시 666이라는 입장도 반대고 동시에 결코 아니라는 입장도 반대다.  그걸 누가 알까?  그때에 당면해서 지혜로 풀면 확실한 답이 나올 것이다.

12월 14일에 한국에 전쟁이 난다는 것도 역시 중도의 입장이다.  다행히 한국에 살지 않아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중도 보다는 99%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머지 1%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전쟁설이나 그 요인이 되는 땅굴이 정말 문제가 되는 요소라면 그 불안 요소를 정부에서 확실히 조사를 해서 대비를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666의 문제도 믿음으로 준비하면 된다.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논리로 보면 단순하지만 현실에는 많은 복잡한 것들이 따라온다.  만약에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666표를 받아도 구원받는다 라고 한다면 계시록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계시록은 이 표를 받는 문제에 있어 단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자살하면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를 뒤집어서 ‘기독교인이 자살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신다.  그것은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가슴 아픈 문제지만,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구원의 관점이 우선이고 구원의 조건을 재고하는 면이 시작일 것 같다.

주님, 666은 나와는 상관이 없음을 압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이며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인치시고 스티그마타를 주소서.  나 뿐만 아니라 주위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도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온전히 주님의 소유로 삼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