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계시록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를 끌던 부분이 13장이다. 용과 짐승 그리고 666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1절 - 어제 말씀 17절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는 지금 보니 여기 1절에 있다. 원어도 그렇고 영어 번역도 그렇다. 원어에서 ‘서있다’는 말이 1인칭이다. 즉 용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데 지금 나오는 짐승을 본 것이다.
아무튼 요한은 지금도 계속 ‘보고’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진짜 바다에서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올라온다고 해석하면 무리라는 뜻이겠다. 계시록에서는 계속해서 하늘, 땅, 바다가 등장하는데, 대부분 구절에서는 진짜 지구상의 바다를 의미하겠지만, 오늘 말씀과 어제 구절에서는 바다가 이방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이방 나라 중에서 짐승이 등장하는데, 짐승하면 길들임 받지 않고 날뛰는 힘센 존재다. 아마도 이방 중에 강한 국가가 나오는 것을 의미할텐데, 요한 당시에는 이를 로마로 이해하고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그 후 얼마되지 않아 힘을 잃기 때문에 로마 패망 후 현재 로마에 버금가는 나라가 등장해야 한다. 사실 많은 국가들이 지난 세기 로마를 따라하기 원했다. 그 중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로마 흉내를 냈고, 지금은 미국이 따라한다. 그런데 계속되는 구절을 보면 이 짐승이 꼭 어느 나라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짐승의 모습이 어제 용의 모습과 비슷하다.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용은 머리가 일곱에 뿔이 열, 일곱 왕관 (7 10 7), 짐승은 뿔이 먼저 나오고 그 수는 열개로 같고 머리가 일곱에 열 왕관이다 (7 10 10). 즉 짐승의 관이 세개 더 많다. 왜냐하면 짐승의 관은 열 뿔에 있기 때문이다. (이 ‘관’은 면류관이 아니라 ‘머리 띠’에 가깝다.)
이쯤되면 용이 계속 주님과 교회를 카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리지널리티가 없다.
아무튼 하늘에서 쫓겨난 용은 그의 모습과 비슷한 짐승으로 세상에서 유형화되는데 그 짐승의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들 즉 ‘의 화평 구원 영광 능력 등, 그리고 충신 진실 (계 19:11)’ 의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닌 것들이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다. 하지만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2절 – 짐승의 모양이 조금 더 나오는데 강하고 기괴한 모양이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준다.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가 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신 것을 또 카피하는 느낌이다. 용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를 위하여 일하는 육적인 형상으로서 짐승이 필요하다.
3절 – 그 짐승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되었다. ‘죽게 되었다’는 헬라어는 ‘σφάζω’로서 정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5장 6절의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정말이지 사탄은 주님을 너무 카피한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이 분별의 영을 갖지 못하면 헷갈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 머리 하나가 죽고 부활한다. 이것이 정말 어떤 역사적인 인물이 될지 아니면 어느 사건이 될지 모르지만, 이제껏 카피만하는 사탄을 보면 정말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이 주님처럼 죽고 부활하는 모습을 띠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일곱 머리 모두가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일 수 있겠다.
죽고 부활의 모습을 보이는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직접 볼 수 있다면 궁금한 것이 풀리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때 아직도 땅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4절 –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하나님 예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마 28:18)” 주신 것 처럼 용도 짐승에게 권세를 준다. 그러자 세상은 용을 경배하고 또 그 짐승을 경배하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하며 그를 따른다.
5절 – 짐승이 용의 영을 받아 이 땅이 이해할 수 있는 음성으로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데, ‘과장되고’라는 단어는 그냥 ‘크다’는 뜻이다. 즉 그의 말하는 것에 큰 영향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여러 세상을 유혹하는 것들은 정말 엉터리같은 것들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들린다. 그렇게 짐승은 마흔 두달 용을 대표해 일한다.
6절 - 그러한 논리로 짐승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장막을 비방하고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비방한다. 하지만 보기에는 좀 어설퍼 보인다. 하늘에 감히 다가설 수 없으니 비방하는 말을 퍼부을 뿐 전혀 하늘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태워버리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지혼자(?) 떠들어 대는 어설픈 형국이다.
7절 – 처음 나오는 ‘권세’라는 단어는 원어에는 없지만 아무튼 그가 성도들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또 그들을 정복한다. 그리고 모든 종족과 언어와 나라 (인종)들에 대해 권세를 받는다. 마흔 두 달 동안 짐승과 싸워 정복당하는 성도들이 있다. 물론 배교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8절 – ‘어린 양’이 한번 더 언급된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믿는 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런데 번역이 잘못 되었다(!!) ㅠㅠ. ‘창세 이후로’는 기록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 양’에 대한 것이다. 바른 번역은 ‘창세로 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이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9절 - 들어야 하는데 어느 부분을 주의해서 들어야 할까? 문맥 상 앞의 내용 보다는 바로 뒤의 구절을 말하는 것 같다.
10절 –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아직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의 태도는 인내와 믿음이다. 물론 지난 역사를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다.
그런데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라는 부분이 분명하지 않아 다시 원어를 보고 여러 번역본을 보니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나온다. 하나는 ‘사로잡혀 가도록 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사로잡혀 갈 것이고 칼에 죽도록 예정되있는 이들은 반드시 칼에 죽을 것이다’라는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만일 누가 다른 사람을 사로잡으려고 하면 자신이 사로잡힐 것이고 다른 이들을 칼로 죽이려면 자신이 반드시 칼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문맥과 문법을 보면 두 번째 해석이 더 맞는 것 같다. 또한 주님께서 “…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개정)” 라고 말씀하신 구절과도 통하는 것 같다. 즉 성도들은 육적인 태도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고 믿고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주님, 성도들이 인내하는 믿음을 배우고 가질 수 있도록 용과 짐승을 도구로 부리는 주님의 권세를 봅니다. 주님이 모든 역사의 주인공이시고, 주 안에 거하는 믿는 이들이 또한 주인공임을 봅니다. 내 뜻과 바램대로 되지 않아도 밑에서 참고 견디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그럼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높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