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 '하늘에 큰 이적'의 이적은 이상 혹은 sign이다. 즉 12장의 내용은 이상이다. 그런데 이 3절에도 다른 이적이 있지만 1절의 이상은 '큰 이상'이다. 여자에 대한 이상인데 그 모습이 요셉의 꿈에 나오는 것과 흡사하다. 즉 요셉의 가족이다. 하늘의 이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진짜 인간 여자가 아니라 '이상'으로서의 여자 즉 하나님의 백성의 총제적 개념이다. 구약의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여자로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여성이며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2절 - 이 여자가 임신해서 해산하게 되어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 새로운 세대 그리고 5절의 '아들'이다.
3절 -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는데 '한 큰 붉은 용'이다. 그런데 이 용은 크고 붉다. 그 정체가 불길한 모습이다. 모습을 잘 보니 머리가 일곱에 뿔이 열이고 일곱 왕관이 있다. 이 내용에 대해 17장을 토대로 여러 주석가들은 로마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로마의 일곱 산 그리고 역사적으로 로마의 일곱 가이사(시저)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냥 로마시대의 이야기로 끝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크고 붉은 용은 자신의 모습을 교회 즉 하나님의 왕국의 모습으로 가장하려는 듯 보인다. 일곱의 숫자와 열의 숫자가 그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왕관'이라는 단어가 이제껏 '면류관'을 말하는 '스테파노'가 아니라 '디아데마타'라는 단어로 '디아 (시간 공간 등을 통과하는), '라는 말과 '데오 (묶다)'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그 뜻은 '머리띠'에 가깝다. 즉 이러한 크고 붉은 용의 모습은 주님의 교회의 모습을 가장한 것 같은 모양이다.
4절 -이러한 모양의 용은 꼬리가 있는데 그 꼬리로 하늘의 별 1/3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 즉 하늘의 무수한 천사들 중 1/3을 함께 타락시켰다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용이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를 삼키려고 지켜섰는데,
5절 - 드디어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라는 단어는 '자녀'와는 차이가 있다. 요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는데 그 '자녀'는 '테크논'이라는 말로 복수에 중성이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자녀들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쉽게 말하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DNA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말은 그보다 더 무게 있는 말이다. '휘오스'라는 이 단어는 첫째 성이 남성격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하며 이 아들은 '남자'가 된다. 갈 4:7에는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하며 아들의 위치는 바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유업을 이을 명분임을 말한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었지만, 로마서 8:29, 그리고 히 1:6에는 '맏아들' 즉 주님이 첫째 아들이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아들들'이 되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이 아들은 '장차 쇠몽둥이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가 된다. 왕권을 갖고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한 아들이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는데, 이 '올려간다'는 단어는 'ἁρπάζω'의 변형으로 고후 12장에서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고, 살전 4:17의 '휴거'에 대한 단어와 동일하다. 여자는 땅에 남지만 사내 아이는 끌려 올라간다. 이 여자가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와 유대인들 중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이라면, 그들 중 '아들'의 명분을 입은 자들 즉 자녀를 넘어서 성숙된 이들이 휴거된다는 뜻인 것 같다.
6절 - 땅에 남겨진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특별한 장소일 수 있겠다. 그런데 사내 아이를 낳은 여자는 오히려 1260일을 '양육'받는다. 이걸보면 아들을 낳은 여자지만 오히려 그 영적 수준은 양육받아야 하는 수준인 것 같다. '양육'이라는 단어는 'τρέφω'로 '영양을 공급받다, 보조받다, 수유받다' 등의 뜻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아이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기독교 내에서 '아들'은 나오지만 정작 여자인 '기독교' 자체는 광야로 들어가서 1260일 하루 하루를 양육받아야 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7절 - 갑자기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하위 천사들이 용과 그 하위 타락한 천사들과 싸운다.
8-9절 - 하지만 전쟁은 금새 끝나고 용과 그 천사들은 땅으로 내어쫗긴다. 땅은 이제 큰일이다. 온갖 재해를 받고 이제 사탄인 용과 그 많은 타락한 천사들이 마음대로 휘젖고 다니는 저주의 장소가 되었다.
10절 -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서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왕국과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11절 - 믿음의 형제들 즉 신앙인들은 크고 붉은 용을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이길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믿는 이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했다.
12절 - 그렇기에 믿음 때문에 이미 땅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휴거되어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한다. 하지만 땅과 바다는 쫓겨나서 분이 가득한 마귀가 득실한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화가 있다.
13절 - 그래서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 즉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14절 - 그 때 그나마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피해 양육받는다. '큰 독수리 날개'는 신명기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의 말씀이 비슷하다. 결국 '양육'의 목적은 성숙과 성장이다.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성숙이다.
그런데 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일까? 원어에는 '때와 때들과 때의 반'이다. 그냥 '세 때와 반 때' 아니면 '때들과 때의 반'이라고 하지 않고 1,2, 1/2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각 때마다 무슨 절차와 점진적인 모습이 있나보다.
15절 - 여자는 지금 세상과 단절된 광야에서 양육받고 있는데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해서 여자가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고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17절에서 '전쟁'을 의미하므로 이 '물'은 군대를 뜻할 수도 있지만, 뱀의 의도는 여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을 보면 이 물은 아마도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 들어간 여자에게 '세속 (약 1:27)'의 어떠한 것으로 영향을 주려고 하는 시도같다. 단시간에 양육을 받으려면 세상과 구별되어 신령한 젖으로 (벧전 2:2) 영양을 받아야 하는데 마귀는 그것을 멈추어 여자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같다.
16절 - 그런데 땅이 여자를 돕는다. '땅'은 하늘과 비교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을 찾아보면 땅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것은 많지 않다. 땅은 하나님의 회복의 대상이다. 이 땅이 여자를 도와서 용의 토한 강물을 삼킨다. 물이 '군대'라면 지진이 나서 군대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물이 '세속'이라면 땅의 어떤 움직임, 예를 들어 기후나 환경 등이 그러한 세속의 물결을 막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입을 벌려'라는 문구일 것 같다..
아무튼 계 17:15을 보면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라고 말하면서 '물'이 세상을 뜻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5절 16절에서 물을 토한 것이 뱀이라고도 하고 용이라고도 한다. 시간적으로 보니 같은 시대인데 15절에서는 뱀이 토했고 16절에서는 용이 토했다. 지금 현재 뱀은 용의 모습이지만 결국 그 원형은 뱀이다. 용의 그 크고 붉고 무시무시한 모습의 원모습은 결국 뱀에 지나지 않는다.
17절 - 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여자에게 분노한다. 닭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모습이다. 여자는 건드리지 못하고 '남은 자 (remnant, 다른 이들, 남은 이들)'와 전쟁을 하려고 돌이킨다.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없다. 이 남은 자들은 'the rest of the seed of the woman'인데 여자의 남은 후손들이다. 즉 정체성이 '여자의 후손'으로 주님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땅에는 물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때 조차 여자를 제외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뒷장 13장 7절에 나오는데 아쉽게도 짐승에게 모두 패배하여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한다.
주님,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서 아들로 성장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배웁니다. 내 속에 성장을 주시고 변화를 가져오소서. 이 문제는 생명의 문제임을 압니다.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그 생명이 성장하실 수 있도록 오늘도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