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 하나님의 성전. 계시록에는 성전에 대한 언급이 꽤 나오는데, 이11장 전까지 언급된 성전은 '하늘의' 성전이었지만 여기 1절 성전은 이 땅의 성전이다. 즉 주님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의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구약 성전의 기능이 재건됐음을 본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성전을 '지팡이같은 갈대'로 측량하라고 하신다. 고대에 갈대는 측량하는 잣대역할을 했는데 '지팡이 같은'에서 지팡이는 ῥάβδος 라는 말로 ῥαπίζω 가 어원인데 이 '라피조'는 몽둥이로 때리다는 뜻이다. 즉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몽둥이같은 갈대'라고 해야한다. 이것은 재건된 성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성전은 두 번이나 파괴되었는데, 역시 주님 오시기 전 재건된 성전 사역에도 문제가 있다. 이미 그리스도가 오셔서 참된 성전을 보여주셨것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다시 구약의 경륜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2절 - 성전 바깥 마당은 원래 이방인들을 위한 지역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여인들의 뜰 바깥 즉 사실은 성전 밖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전 재건을 하면서 공간적으로 이방인들과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일지도... 아무튼 이러한 타협으로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 즉 예루살렘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을 구실을 제공한 것 같다.
3절 - 두 증인이 권세를 받는데 회개를 뜻하는 굵은베 옷을 입고 1260일 즉 동일한 마흔 두달을 예언한다. 주님의 진노 중에도 긍휼이 있다.
4절 - 이 두 증인이 누구일까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데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씀한다. 이것을 해석하면서 모세와 엘리야 혹은 에녹과 엘리야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히 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말씀을 토대로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휴거'되었기 때문에 앞의 말씀대로라면 한번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모든 휴거되는 사람들도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맞지 않는 해석이다. 휴거는 죽음보다 강한 죽음을 뛰어 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이며 동시에 '두 촛대'이다. 이 '촛대'라는 말은 계시록 앞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로 계속 나오다가 이번 장을 끝으로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보통 감람나무, 정확히 말해서 올리브나무는 기름을 짜는 나무이므로 성령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개를 합해 생각해 보면 주님 오시기 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두 존재를 나타내는데, 촛대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면 개인을 뜻하기 보다는 교회를 혹시 의미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도 11절 말씀을 보면 그냥 두 개인일 확률이 더 높은 듯 하다.
5절 - 그들은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확실히 받는다.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원수를 제압하기 때문에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유튜브 조회수가 엄청난 기록을 세우지지 않을까?
6절 - 그들은 보호받는 것 뿐만 아니라 능력을 행해서 하늘의 비를 그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며 그 외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다. 마치 모세를 보는 듯하지만 이번에는 두명이다. 아마도 한 명은 유대인들을 대하여 다른 한 명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 같다.
7절 - 마흔 두달 동안 증언을 하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많길래 42개월 동안 증언을 할까? 아마도 이 땅의 죄에 대해 또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증언하는 듯 하다. 시간이 차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현재진행형)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인다.
8절 -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방치되는데, 분명 이 큰 성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크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플라테이아'라는 말인데 그 뜻이 '넓다'이다. 그런데 '블레셋' 즉 '팔레스타인'의 원래 출신이 그리스라고 한다. 흠.. 뭔가 연결이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 큰 성은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화평의 도성' 혹은 '성지'가 이제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 되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은 성 밖에서 못박히셨지만 '성'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곳이다. 이러한 말씀은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큰 이단인가!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에게 소위 '성지'는 이제 더 이상 거룩한 곳이 아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고 우리가 밟는 땅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9절 - 이러한 기록에 대해 아마도 전에는 그 가능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과 여러 매개체로 전 세계에서 생방송으로 뉴스를 접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둘의 시체가 사흘 반동안 방치되어 뉴스를 탄다.
10절 - 앞 장의 모든 재앙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그 모든 재앙의 원인을 분명히 두 증인들이 증언했음에도 증인들이 죽자 그냥 자연재해로 여기며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 받는다. 무척 떠들썩한 축제의 모습이다.
11절- 하지만 삼 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다시 일어서니 이 때에는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한다. 즉 이 때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보지 않고 구경하는 자들이 본다.
12절 - 하늘의 음성이 오라고 하시자 그들이 듣고 주님께서 승천하셨던 것 처럼 '구름 안에서' 승천한다. 즉 구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승천하는 그들을 가린다.
13절 - 그 때 지진으로 그 도시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7천이 죽는다. 결국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이 당한 재앙이 자연재해가 아님을 알게 된다.
14절 - 드디어 둘째 화가 지났다. 하지만 숨돌림 틈도 없이 셋째 화가 이른다.
15절 - 드디어 마지막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로 세번째 화가 임해야 하는데 그 전에 하늘에서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 즉 이 세상 모든 나라(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영원토록 다스리심 받음을 큰 음성들이 말한다.
16절 - 전반부 24장로들이 다시 등장하여 그들의 얼굴을 숙이고 (땅이라는 단어는 없다) 하나님께 경배한다. '경배'라는 말은 몸을 숙여 절을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는 아직도 이런 몸을 완전히 숙여 경배하는 것이 있는데 왜 기독교에는 사라졌는가?
17절 -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고 전능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감사한다.
18절 - 이방인들의 '분노'와 주의 '진노'는 같은 단어이다. 즉 이방인이 하나님께 화를 내자 하나님이 화로 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삐지거나 화를 내면 우리만 손해다. 그 분께는 오직 순종하며 사랑하며 경외해야 한다.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종 즉 노예들인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작고 큰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는데 이 '상'의 뜻은 대가 혹은 급여이다. 노예들은 급여를 받지 않고 주의 종들은 대가를 바라고 주를 섬기지 않지만 그들은 놀랄만한 급여를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이들 즉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은 멸망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가 이 때 (카이로스)다.
19절 - 1절의 성전은 이 땅의 성전이지만 여기의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에 있는 성전이다. 그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다. 주님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지성소가 드러난 경악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형으로 지금 하늘의 성전의 언약궤가 보이는 사건을 말해줬다. 구약의 경륜은 끝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그분을 계시하셨다. 이러한 일로 다시 카메라는 땅으로 돌아가는데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게된다.
주님, 하나님되심을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몸을 숙여 예배합니다. 주는 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예비하시고 영광받으십니다. 이 땅에 계속해 증거하시기 위해 두 증인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주님을 높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