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인을 뗀 후 여섯번 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두 번째의 재앙(화)이다. 앞서 메뚜기 재앙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을 당하게 한 고난이라면 그 고난 후에 이제 드디어 인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이번 재앙이다.
13절 – 여섯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음성이 나온다. 제단은 제물을 위한 것이고 네 뿔에 제물의 피를 발라 제단을 깨끗게 한다. (레 8:15, 겔 43:20) 제물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것이고 (속죄제, 화목제 등) 그리스도는 단번에 드려져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키신 단 하나의 제물이시다 (히 9:12, 10:10). 그 분의 피가 금 제단 네 뿔에 발려졌고 그 피가 말씀하신다. 뿔은 네 뿔이지만 ‘한 음성’이 말씀하신다. 역사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거역하는 이들을 제물 삼으신다.
14절 – 그 음성은 여섯 째 천사에게 말하는데 큰 강 유브라데 위에 결박되어온 네 천사를 놓아주라고 한다. 보통 천사라고 하면 흰 옷 입고 광채가 나고 날개 달린 존재를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 나오는 ‘네 천사’는 오히려 악마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이 여섯번 째 나팔의 시간을 위해서 이제까지 결박되어온 (사슬로 묶임당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능력은 가공할 만하지만 그들은 ‘놓아주게’된다. 즉 여섯째 천사가 더욱 강하다. 여기 ‘놓아주라’는 명령어는 2인칭 명령형이다. 즉 여섯 째 천사에게 ‘너는 놓아주라’고 하는 말이다.
15절 – 드디어 이 무시무시한 네 천사들이 사슬의 결박에서 풀렸다. ‘년월일시’라고 번역된 것은 원어로 ‘그 시와 날과 달과 해’이다. 이것이 모두 더해서 1년과 한 달과 하루와 한 시간일지 아니면 특별한 때의 단 한시간인지는 잘 모르지만 단 한 시간 내에 인류의 삼분의 1을 죽이는 사건은 아닌 것 같다. 다음 구절들은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절 – 마병대 즉 유동성을 위한 전략적 군대다. 그런데 그 수가 이만 만, 이만 곱하기 만 즉 2억이 된다. 이같은 수는 너무 많아서 요한은 셀 수 없지만 그 수를 '들었다'고 한다.
17-19절 - 2억 마리의 말을 한번에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보니 이 마병대의 모습은 진짜 말들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장갑차나 자주포 등과 흡사하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또 앞으로 만들어질 장갑차의 수는 2억은 족히 될 것이다. 이것들로 인해 사람들의 삼분의 1이 죽임을 당한다. 세계 1, 2차 대전 때에도 사람은 많이 죽었지만 1/3이 죽지는 않았다.
20절 – 1/3이 죽었지만 그중에 살아남은 인구 2/3 는 회개하지 않고 귀신과 우상들을 섬긴다.
사람들은 이런 환난을 당하면서도 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면 너무도 ‘사랑의 하나님’을 곡해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해도 항상 용서해주시고 참아주시고 은혜로 덮어주시는 분으로 듣고, 또 길에 가다가도 ‘Jesus loves you’ 혹은 ‘God is love’라는 문구를 너무나도 봐왔기 때문에, 이 ‘사랑’이라는 것만 부각되고 ‘은혜’라는 것만 머리 속에 들어오게 되어 그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인지, ‘은혜’가 왜 필요한지 잊혀지게 된 것 같다.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필요하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은혜 또한 필요없다.
21절 – 그 아우성과 사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죄는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죄로 위의 귀신 및 우상 숭배와 더불어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을 나열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남을 핑계삼고 서로 죽이며, 복술 (원어로는 φαρμακεία 라는 말로 영어의 ‘pharmacy 약학’의 어원, 즉 마약 등 한 순간의 괴로움을 잊게 하는 방편, 그리고 점치는 것 등을 포함), 음행 (혼외 성교, 짐승과 교접, 동성간 성교 등), 도둑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 불로소득) 등을 계속한다. 사실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은 20절 우상 숭배의 결과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은 자연히 따라온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네 가지 중 음행만 단수고 모두 복수다. 즉 살인들, 복술들, 음행, 도둑질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왜 음행만 단수일까? 원래 ‘음행’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쓰이나 해서 찾아보니 마 15:19 에는 복수로 나왔다. 인터넷을 찾아도 답이 안나와서 좀 더 묵상해보니 고전 6:18이 생각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다른 죄들에는 여러 모양이 있지만 음행이 독특하게 본질적으로 단수 (하나)인 것은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거된 모든 죄들 마다 ‘그들의’ 즉 ‘auton’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동일하게 복수다. 그래서 단수의 ‘음행’에도 복수의 ‘auton’이 붙었는데 문법상으로는 좀 맞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요한은 음행은 결국 하나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고전 6:17)’에 대조해 음행을 말하면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바로 음행임을 말씀하는 것 같다. 결국 음행은 우상 숭배에서 오기 때문이다.
주님, 사망과 고난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 속에도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과 우상들을 마음에 두고,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러한 죄들에서 완전히 떠나게 하소서. 저를 씻으시고 수술하시어 죄 짓기에 빠른 모습을 떠나 온전히 행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