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내용은 참으로 난해한 것들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 특히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휴거 등에 대해 벧후 3:16에는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씀하며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지 말하야 할 것을 경고한다. ‘억지로’라는 말은 στρεβλόω 인데 ‘왜곡시키다, 고문하다, 비틀다’ 등의 뜻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는 것은 ‘무식’하거나 ‘굳세지 못’해서이다. 계시록에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무식’하거나 ‘굳세지 못’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6장에서는
드디어 어린 양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데, 처음 넷을 떼실 때마다 네 생물이 함께 하고 거기에 대해 네 말과 그 탄 자에 대해 기록한다. 문제는 첫번째 말이다. 그 후의 말들은 모두 설명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데 첫째 말에 대해서는 그 정체가 무엇이라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흰 말과 그 탄 자가 ‘그리스도’다 혹은 그 반대로 ‘적그리스도’다 혹은 역사를 통해 퍼져간 복음이다 등의 여러 해석들이 있는데, 이 문제로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했다.
성경에는 많은 대조와 대비가 등장한다. 6장 말씀 역시 대조와 대비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네 생물과 네 말들이다. 그렇게 보면 흰 말과 그 탄 자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느낌이다. 더우기 4절에 ‘다른 붉은 말’에서 ‘다른’ 이라는 단어는 ‘종류가 아예 다른’이 아니라 ‘또 하나의’라는 뜻이 있다. 즉 두번 째 말이 부정적인데, 첫째와 비교해서 ‘또 하나의’ 말이다. 즉 첫째 말도 부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말의
모습은 좋은 모양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흰색은 깨끗하고 순수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계시록 19장에 주님께서도 흰 말을 타시고 등장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가짜인 것 같다. 그 탄 자가 ‘칼’을 가지지 않고 ‘활’을 가졌다. 구약에서는 전쟁이 하도 많아서 ‘활’이 항상 부정적으로 쓰여지진 않았지만, 창 10:9의 니므롯에 대해 ‘힘 센’ 혹은 ‘강한’이라는 뜻에는 부정적인 암시가 있다. 특히 엡 6:16에서는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라고 하며 ‘악한 자’가 칼을 가지지 않고 불화살을 쏘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는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는 모양이다. 주님이라면 면류관을 이미 소유하셨지 받을 필요가 없다. 물론 이 면류관의 원어는 ‘스테파노’이므로 다른 모든 면류관과 같은 단어지만, 그 재질에 대해서도 또한 그 의미에 대해서도 추가 설명이 없다. 즉 금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면류관인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단지 흰 말과 그 탄 자가 어떤 권위를 부여받은 것을 보여준다.
셋째로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지만 그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 ‘이기고’의 원어 역시 ‘이기는 자’와 같은 ‘니코스’이다. 하지만 이 흰 말과 그 탄 자의 이김은 여기 저기 날뛰면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있는 느낌이다.
그 탄 자가 가진 ‘활’을 좀 더 생각해 보면, ‘활’은 화살이 있어야 하는데 활만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미 화살이 떠난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를 강타한 것들이 르네상스 (물론 중세 암흑시대에 대항하여), 다윈 진화론, 그리고 요즘 들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그 화살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화살은 이미 떠났고 그 결과 많은 혼돈과 혼란, 그리고 뒤따르는 다른 세 말들이 온다.
둘째 말은
붉은 말이고 전쟁을 뜻한다. 그는 ‘큰 칼’을 받았다. 믿는 이들과 주님의 칼은 ‘큰 칼’이 아니다. 원어로는 짐승을 잡을 때 쓰는 푸줏간 칼의 모양인데 그 크기가 꽤나 큰 좀 무식하게 보이는 칼이다.
셋째 말은
검은 색이고 기근을 뜻한다. 저울을 가졌는데 6절의 내용 즉 극심한 식량난을 측량하는 것을 위함이다. 하루 종일 일해도 입에 풀칠할 정도 밖에 양식을 얻지 못한다. 밀, 보리, 올리브유, 포도주 등을 은유적 혹은 비유로 해서 소위 ‘영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은 그냥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넷째 말은
청황색인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 즉 이러한 말들과 그 탄 자들은 모두가 상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망’을 의인화했는데 사실 사망은 성경에서 인격화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 사망을 이어서 죽은 자들의 집합소인 음부가 따라온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들로 죽임을 당한다. ‘사분의 일’이 헷갈려서 조사해보니 이 원어 τέταρτος 는 ‘사분의 일’도 되지만 ‘네번 째’ ‘넷’의 뜻도 된다. 즉 ‘사분의 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네 곳’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바로 다음 7장 1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즉 땅의 네 모퉁이를 모두 잡아서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과연 이러한 것들의 시기는 언제일까가 궁금하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네 말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되어진 것들이다. 특히 주님 승천 후 계속 되었다. 마치 전도서 내용처럼 인류의 역사가 화려하고 큰 발전을 이룬 듯 해도 그 속 내용은 죽음의 연속이고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다섯째 인
순교자들은 희생 제물이 되어 제단 아래 있다. 역사의 각 부분마다 주님을 증거하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들이 주님께 탄원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소위 ‘대환난’을 통과하며 죽임을 당하게 될 사람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수가 차야한다 (롬 11:25).
여섯째 인
대환난의 전조다. 계시록의 기록상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에 대해 시제가 좀 헷갈리는데, 개인적으로 일곱 인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일곱 나팔은 여섯째와 일곱째 인의 세부사항을, 그리고 일곱 대접은 대환난의 보다 세부적인 사항을 묘사한 것 같다. (물론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
대환난의 전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12, 13절의 내용은 역사적인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14절 내용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 내용이 벧후 3:10-12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은 우주를 뜻하기보다 아마도 대기권을 말하는 것 같다. 대기권은 우주로 부터 오는 위험한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방패의 역할을 하지만 대기권이 말려 풀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껏 끄덕없던 사람들은 이제야 비로서 하나님의 재앙에 두려워한다.
7장 1절은 네 천사가 등장하고 땅에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데, 대기권에 이상이 생겼고, 아마도 지구의 자전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2절 – 위의 네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았다.
3절 – 하나님의 종(노예)들이 인침을 받는다. 그러기 전에는 환난이 시작되지 않는다. 아마 이들은 환난 중에 특별한 일을 하게 될 이들일까?
4절 -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로서 ‘십사만 사천’이다. 이들 안에 포함되려면 유대인이어야 한다.
5-8절 - 이러한 지파들을 소위 ‘영적으로’ 해석해서 ‘참 이스라엘’된 우리 믿는 이들이라고 해석한다면 무리다. 바로 뒤 9절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우리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러한 ‘영적인’ 해석이 우세했지만 유전학의 발달로 사람의 유전자를 통해 그 뿌리를 아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현대를 사는 유대인 중에 그들의 출신 지파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물론 그러한 것을 알 수 없어도 인치는 것은 주님이시기에 걱정할 것 없다.
9-10절 – 주님의 보혈로 죄씻음 받고 흰 옷 입은 수많은 영혼들은 주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린다. 이들이 먼저 찬양을 하면
11-12절 – 모든 천사들이 또한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한다. 땅에는 환난이지만 하늘에는 영광과 찬송이 가득하다. 나는 어디 있을 것인가?
13-14 절 – 흰 온 입은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한다. ‘큰 환난’은 ‘대환난’일 수도 있고, 역사를 통한 여러 모양의 환난일 수도 있지만, 문맥상 아마도 역사적인 여러 모양의 환난이 더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 대환난은 시작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나오는’ 이라는 단어는 ‘에르코메노이’인데 소위 ‘deponent verb’ 로서 이 의미는 능동태이지만 형태는 다른 격이다. 즉 환난에서 나오지만 그들의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기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계시록은 '행함'을 강조하지만 주님의 은혜에는 변함이 없다.
15-17절 – 우리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장막 치시는’ 즉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