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5장에서는 어린 양이 계시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들 안에 계신 인자를 보고 하늘 보좌를 보고 영광과 실체를 보고난 후 결국 결론적으로 요한이 보게되는 것은 어린 양이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 바로 앞에 어린 양이 있다.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볼 수 (인식되어질 수) 있다.

다음 장 6장 부터 12장 까지는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이 잠시 사라지다가 다시 13장 부터 계시록 끝날 때까지 매 장 마다 어린 양이 등장한다. 6-12장은 소위 ‘대환난’에 대한 언급이고 이 땅 위에 임할 심판이기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무시한 사람들에 대해 어린 양이 잠간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그 후에는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계시록의 주인공이 바로 이 어린 양과 교회이기 때문이다.

‘어린 양’ 하면 신약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구약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가죽을 얻기 위해 죽임 당했을 동물, 그리고 구약의 제물 등이 생각난다.

1절 – ‘내가 보매’-‘보다’라는 이 단어는 계속 나오는데 눈으로 본다는 뜻도 있지만 ‘인식하다’라는 뜻도 강하다. 지금 요한은 영 안에 있기 때문에 ‘본다’라는 말을 육적인 눈으로 본다라기 보다는 영 안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원어에서는 두루마리 책 ‘뒷 면’에 일곱 인으로 봉했는데, 육적인 시각으로는 ‘뒷 면’을 동시에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카메라로 촬영하듯 보여지는 느낌이다.

2 절 – ‘천사’는 ‘앙겔리온’으로 ‘복음’이 ‘유앙겔리온’ 혹은 ‘에반겔리온’ 등으로 읽어서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이듯, 보통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라는 뜻이다. 보통 흔히들 연상하는 흰 날개 둘 달린 천사는 성경에 없다. 그룹과 스랍 (체루빔과 세라빔)이라는 천사들 즉 특별한 천사들만이 날개가 있는데 여섯개의 날개가 있다 (사 6:2, 에스겔 10, 계 4:8 등).

3절 – ‘하늘’이라는 단어는 οὐρανός 로서 ‘대기권’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 (고후 12:2) 모두에 쓰인다. 즉 땅과 대조해 땅 위의 모든 공간을 가리킨다.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 그 어디에도 이 봉인을 풀만한 이를 찾지 못했다.

4절 – 1장에서 요한이 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는 되었어도 울지는 않았다. 여기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크게 우는 모습을 보인다. 요한에게 이 의문의 두루마리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갈망이 마치 그를 어린 아이처럼 만들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의 비밀을 알기 위해 울고 있는가?

5절 – ‘유대 지파의 사자’ 그리고 ‘다윗의 뿌리’는 분명 주님 예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말씀을 열어주시고 말씀 자체가 주님이시다.

6절 - 5절에 ‘장로 중에 한 사람이’ 말한 것은 ‘유대 지파의 사자’였다. 그런데 요한이 본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어린 양이시다. 사자는 승리했지만 어린 양은 일찍 죽임을 당했다. 크리스천의 승리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끝내는 죽음과, 주님과 함께 부활함을 통해서이다. 이 어린 양은 일반적인 어린 양은 아닌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기 때문이다. 일곱 눈이 일곱 영이기에 아마도 일곱 뿔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교회는 어린 양의 뿔 즉 영광이다.

7절 – ‘취했다’라는 말은 ‘람바노’라는 말로 ‘당당히 가지다, 받다’라는 뜻이다.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보좌에 앉으신 분께 어린 양은 당당히 두루마리를 취하신다. 그 분은 하나님 이시다.

8절 – 어린 양의 신성이 분명 나타난다. 그는 일찍 죽임을 당하셨어도 세세토록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24장로들과 네 생물 각각 수금과 금대접을 가졌는데, 수금은 음악을 위한 것이다. 금대접은 향을 모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 앞에 향기로운 것일까? ‘성도’라는 말은 ‘하기온’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성령’이 ‘프뉴마 하기오’ 즉 거룩하신 영이므로 ‘성도’라는 말은 흔히들 말하는 ‘성인’이다. 세계 4대 성인이 성인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이들이 바로 성인들이다.

9절 – 그래서 수금을 가진 그들은 새노래를 부른다. 지휘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찬양단이 24명 정도일 때 가장 화음이 좋다고 한다. 물론 수가 더 많으면 더욱 웅장하고 좋겠지만 가장 소리가 예쁘고 효과적일 때가 24명이라고 한다. 천상의 24 멤버 찬양대가 각자 수금을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멋지고 영광스럽다. 흠.. 이런 찬양대 없나? ㅎㅎ

‘새 노래’의 ‘새롭다’는 시간적으로도 새롭지만 그 질적으로도 새롭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교향곡은 오래된 곡이지만 오늘 바로 연주를 하면 시간적으로 새로운 연주이다. 지금 연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항상 새로운 분이시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분이시다.

그래서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부른 찬송은 '질적'으로 새로운 노래를 하는데 바로 주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양한다. 2천 년전 사건이지만 그 구속의 사건은 오늘도 새롭다.

10절 – 믿는 이들을 피로 사셔서 구속 (구해서 속했다) 하신 것만 아니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계 1:6절에도 동일) 개정역에는 ‘나라’로 번역됐지만 원어로는 ‘바실루스’ 즉 ‘왕’이다. 이러한 왕족 제사장들인 참된 믿는 이들은 후에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왕같이 다스린다.

11절 – 요한은 계속 보고 있다. 또 듣고 있다. 주님, 내 눈과 귀를 열어 보고 듣게 하소서. 갑자기 보좌를 두른 무수한 천사들이 있음을 본다. 카메라가 갑자기 줌 아웃된 듯 한 느낌이다.

12절 – 이들 또한 보좌 앞의 어린 양을 큰 소리로 찬송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그에게 돌린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13절 – 카메라 포커스가 이제 하늘의 보좌에서 더욱 줌 아웃되어 모든 피조물을 담는다. 즉 이 세상 온 우주의 모든 만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찬양한다. 하늘에서는 이미 만물이 회복되었다. (행 3:21)

14절 – 모든 피조물이 찬양하자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리고 영원히 사신 분께 24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한다. 영광! 영광!

주님, 영광이 가득하고 전혀 문제 없는 하늘을 봅니다. 나도 그 찬양에 합류하기 원하고 일찍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영원히 살아계신 어린 양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전능하심과 영광을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