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17에는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라는 기록이 나온다. 앞의 15절에는 사환 게하시가 자신들이 적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고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라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엘리사는 게하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즉 현실은 막막하게 보였지만, 실재 혹은 실체는 주님의 강력한 보호하심과 임재하심이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라는 말씀의 ‘진리’는ἀλήθεια 라는 단어로 ‘진실한’ 혹은 ‘참된’의 뜻인ἀληθής 에서 온 명사형인데 ‘진리’ 곧 변하지 않는 어떠한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재’를 뜻하기도 한다. 즉 눈에 보이는 어떤 것 혹은 그림자에 대한 그 참된 본질과 실체를 말한다.
평생을 주님 섬기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온 요한이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를 접했을 때 그의 마음과 느낌은 어땠을까? 기쁨과 위안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실망도 많았을 것 같다. ‘이게 정말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들입니까? 나와 사도들이 평생 해온 사역의 결과입니까?’ 라고 실망과 아쉬움도 있었을 것 같다. 일곱 교회 모두가 모두 강하게 빛을 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면 좋을텐데 그 빛은 바람 앞에 약한 촛불의 모습이다.
촛대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고 기름을 가지고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일곱 영은 등불(혹은 횃불)로서 촛불에 비해 바람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빛이다. 요한은 현실을 바라볼 때 많은 어두움과 고통을 보았지만 영 안에 있게 될 때 (2절), 성령에 충만할 때 현실을 넘어선 실재를 보게 된다. 그 실재란 바로 변함없으신 하나님 보좌와 그 영광, 그리고 일곱 촛대를 지키는 막강한 일곱 등불이었다.
참된 현실 곧 실재는 내가 영 안에 있을 때, 성령 충만할 때 볼 수 있고 또 살아낼 수 있다. 모든 것은 영적 실체에서 오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제대로 투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실재를 알 수 있으려면 그림자를 보지 말고 빛을 봐야 가능하다.
본문에는 많은 내용이 있고 에스겔 내용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24장로들에게 관심이 간다. 어떤 주석가들은 구약 12지파와 신약의 12제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해석에 별 공감이 가지 않는다. 12지파는 곧 뒤에 나오긴 하지만 제자들에 대해서는 가룟유다를 제외하면 맛디아인지 아니면 바울인지도 잘 모르겠다. 더우기 지금 이러한 계시를 보는 요한도 12제자 중 한명인데 자신이 24장로 중 한명일 수는 없다. 아마도 그들은 영적존재일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썼던 금 면류관을 벗어 보좌의 하나님께 (혹은 주님께) 드리는데 아마도 이들은 하늘의 다스리는 권세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이들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 영광과 권세를 돌려드린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과 권세가 있다.
그런데 금 면류관의 ‘면류관’이란 단어는 ‘스테파누스’인데 여기서 파생된 이름이 바로 사도행전의 ‘스데반’이다. 잘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인물로서 하늘의 영광을 처음 본 것은 요한이 아니라 바로 스데반이었다. (변화산 사건은 주님 부활전이기에 패스) 그러고보면 스데반이야 말로 현실을 제대로 보고 실재를 산 사람이었다. 그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현실’에 놓여있었지만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 즉 ‘실재’를 봤던 사람이다. 보좌에 앉아계셔야 할 주님이 오히려 서서 스데반을 영접하시게 만들었던 면류관, 스데반. 영광이다.
주님, 하늘에는 또 주의 보좌에는 문제가 전혀 없고 영광이 가득한 것을 봅니다. 오늘 삶이 하늘에 있게 하옵소서. 현실은 또 하나의 하루일지 모르나 그 뒤에 있는 실재를 보고, 경험하고, 살기 원합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내 영안에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