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장에서 주님의 모든 관심은 일곱 금촛대로 표현된 교회에 있음을 알았다. 그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곱 별 즉 일곱의 메신저들이 있고, 그 일곱 교회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 있다. 수는 일곱으로 복수이지만, 일곱 개의 교회 모두가 금촛대로서 동일한 하나님의 한 교회 한 몸임을 말씀하듯이 일곱 영들 역시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의 영이시다.
계시록 2장부터는 드디어 각 교회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각 교회를 알기 위해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각 교회의 명칭, 각 교회를 위해 계시하시는 주님 당신의 어떠하심, 칭찬 혹은 격려의 말씀, 책망의 말씀, 권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의 유무, 그리고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이다.
만일 이러한 교회들이 그 옛날 소아시아라는 지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오늘은 그냥 ‘교훈’으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계시록은 ‘묵시록’ 혹은 ‘예언서’가 아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을 말해온 책이고 오늘을 말하고 있는 책이고, 앞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국의 완성을 예언하는 책이다.
에베소
첫 교회 에베소는 그 이름의 뜻이 ‘desirable’ 혹은 ‘permitted’ 등의 뜻으로 ‘호감이 가는’ ‘기대가 되는’ 등의 뜻이다. 사실 에베소서를 봐도 에베소는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호감가고 기대가 되는 지역이었다. 바울 서신 중 하나인 에베소서의 내용은 깊고 높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후서에 비교하면 영광이 가득하다.
여러 성경주석가들은 에베소교회를 초대교회로 본다. 그 이유는 우선 계시록에 처음 언급되었고, ‘첫 사랑’에 대한 언급은 물론 에베소 교회의 위치가 소아시아 관문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정말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대하실만한 교회였다.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나눠쓰고 함께 먹고, 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높이는 정말 천국의 모형이었다. (행 2:44-47)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첫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하시는 말씀은 조금 다르다. 바로 그 ‘첫 사랑’을 잃었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된 것일까? 사도행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초대교회가 시간이 지남으로 변질되었던 것 같다. 주님이 바로 오실줄 알았는데 계속 오시지 않고 처음에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서로 공유하고 하던 실행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리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세대에 오실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1절 당신의 어떠하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라는 표현을 왜 쓰셨을까? 에베소 교회 즉 초대교회는 자신들 외에 교회가 더 있을 것임을 알아야 했다. 앞으로 여섯 모양의 교회들이 더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2000년에 걸쳐 일어난 교회들이다.
2절 -3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얼마나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장점을 모두 기억하시는지 말씀하신다. 환경적으로 쉽지 않은 일들을 해낸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이다.
4절 - 주님은 ‘다소’ 책망할 것이 있는데 바로 ‘첫 사랑’ 즉 시간적 또 질적으로 가장 먼저되는 사랑을 잃었다는 것이다.
5절 –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즉 ‘타락’했는지 ‘생각 (기억)’해보고, 자신을 돌아보고 ‘처음 일들을 행’해야 했다. 계시록은 사실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다. ‘믿음’은 비밀스럽고 주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즉 ‘우선 순위’인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 (약 2장) 그렇다고 행위를 먼저 말씀하지 않으신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행위가 없어졌다.
6절 – 주님께서는 소위 ‘샌드위치 대화법’을 쓰시는 것 같다. 칭찬-책망-칭찬(혹은 위로)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그런 면도 있지만 소위 ‘니골라’당에 대한 주님의 ‘역겨우심’을 강조하신다. ‘미워하노라’ μισέω라는 단어는 상당히 능동적으로 미워하고 역겨워한다는 강한 단어이다. 도대체 니골라 당이 무엇이길래 주님께서 속된 말로 미워 죽겠다고 하실까? ‘니골라당’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그 역시 원어로 보면 그냥 이해가 된다. 어떤 주석에서는 15절이 14절과 연결된 것을 말하면서 니골라당을 발람의 우상의 제물과 연결시키지만 그 내용을 잘 보면 발람의 우상의 제물과 음행은 니골라당의 ‘결과’임을 말함을 알 수 있다. 니골라 (Νικολαΐτης) 라는 말은 합성어로 ‘정복’이라는 단어와 ‘백성’이라는 단어 즉 다시 말해 ‘교권주의’를 말한다. 사제 혹은 목사만이 소위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을 ‘지위’로 바꾸어 버리는 무리들이 바로 니골라 당이다. 주님은 이러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겨워 하신다.
7절 – 처음으로 ‘이기는 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교회 안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들’을 부르신다. 교회는 닫힌 곳이 아니라 열린 곳이기에 가라지들도 있고 불신자들도 있다. 그리고 세상과 주님 사이 양다리를 걸친 이름 뿐인 신자들도 있다. 그 중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들’을 부르신다. 재미있는 것은 이기는 자들의 ‘이기는’은 ‘니골라당’의 앞 부분 ‘니코스’와 같은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 16:33)’ 즉 이미 이겼다는 문제가 아니라 ‘계속 이기는’ 즉 현재 진행형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삶 가운데 승리하도록 부르신다. 이기는 자들은 ‘생명 나무에서 부터 나오는 것’을 먹게 하신다. 즉 영생을 누리게 하신다.
에베소 교회는 이제 역사상 사라진 교회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에베소 교회는 이 땅에 없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신 교훈을 이 시대를 사는 믿는 이들, 특히 이 시대의 ‘이기는 자들’은 들어야 하는데, 에베소 교회가 이겨야 할 대상은 바로 ‘첫 사랑을 잃은 문제’와 ‘니골라당’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형태의 교회에 출석하든지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하며, 니골라 당을 주님처럼 미워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두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서머나 교회
‘서머나’라는 단어의 어원은 ‘몰약’이다. 몰약은 나무에 상처를 내어서 나오는 진으로 만든 것인데 그러한 이유로 성경에서 몰약은 고난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정세로 초대교회는 큰 환난을 맞게 된다. 아마도 카타콤 시대 였을 것 같다.
8절 – 이러한 환난을 당한 교회에 주님은 다시 한번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이’이심을 밝히신다. (재미있는 것은 지도를 보니 일곱 교회들의 위치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를 닮았다.) 고난을 통과할 때 이 모든 것들은 지나갈 것이고 결국 마지막이 있음을 아는 것은 큰 위로이다. 그리고 죽지만 또한 부활할 것을 아는 것도 큰 힘이 된다.
9절 – 그래서 주님은 그 고통 당하며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지만 그 본질과 내면에 있어서 그들은 결코 궁핍하지 않고 오히려 부요함을 말씀하신다. 그 ‘부요함’은 뒤에 나오는 ‘비방’과 관련이 있다. 이 ‘비방’이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당신을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이라며 돌로 치려고 하던 그 ‘신성 모독’과 관련이 있다. 그 때는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해 ‘신성 모독’을 말했지만, 이제는 자칭 유대인들이라는 ‘거스르는 자’ 즉 사탄의 모임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전에는 인간으로 오신 주님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게 보는 것이 신성 모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어떠함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에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신성 모독이 된다. 서머나교회가 고통을 당했지만 부요했던 이유는 바로 신성하신 주님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10절 – 10이라는 수는 완전수로서 서머나 교회가 받는 고난은 그들을 완전함으로 이끌게 하는 도구였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기까지 그 환난을 통과하면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이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얻게 한다. 그냥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시간적인 개념의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뱀의 유혹과는 다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만드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빠르고 쉬운 길’ 즉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여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위치에 서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결국 타락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것은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에 참예할 수 있는 (히 12:10) 길을 열으셨다.
11절 - 7절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말씀은 단지 에베소나 서머나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서머나 교회의 이기는 자들은 환난을 이기는 자들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이러한 환난을 감내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이기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환난으로 죽임을 당해도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죽음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라는 말은 ‘망대’ 혹은 ‘요새’ 혹은 ‘높다’라는 뜻이다. 신기한 것은 환난을 받은 교회 뒤에 갑자기 망대같이 높아진 교회가 나타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교회가 환난을 견디고 주님께 충성하자 로마는 기독교를 아예 국교로 만들어 버린다. 갑자기 높아진 것이다. 궁핍함으로 환난을 통과한 교회가 갑자기 망대로 세워졌다. 정치적인 입지가 생기고 거듭나지 못한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2절 – 주님은 당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말씀하신다. 좌우에 날선 검은 무서운 표현이다. 무언가 잘라내고 죽일 것이 있고 심판할 것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혹시 지금 우리 기독교의 현실은 아닐까?
13절 – 이 구절이 좀 헷갈린다. 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해서 원어를 보니 다시 킹제임스가 더 잘 해 놓았다. “내가 너의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곧 그 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즉 여기에서 ‘행위’와 ‘거하는 곳’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부정적인 것으로 말씀하신다. 뒤의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앞에는 접속어 ‘kai’가 있는데 이 단어는 ‘그리고’ 내지는 ‘그런데’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앞 부분은 12절 ‘검’이 등장하는 이유로서 부정적인 이유가 되지만 ‘그런데’ 그래도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의 부분은 칭찬의 부분이 된다.
버가모 교회는 정치와 권세와 연합한 '망대'로서 높아지고 주님을 떠나서 검을 받아야 하는 행위와 사탄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주님의 교회로서 아직도 남은 자 즉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남아 있었다. 이 ‘안디바’라는 인물 역시 실존 인물로 여겨서 연구하게 되면 2천 년전 이야기인지라 여러 문제가 생긴다. 역시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교회가 정치와결탁하여 사탄의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유일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신실한 이들이 존재하고 '안디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은 모두 ‘안디바’가 된다. ‘안디바’는 현실의 대세를 거느리는 이들이다. 모두 타락하고 모두 정치와 결탁하고 모두 현실의 안녕을 추구해도 ‘안티파스 (against all)’ 즉 ‘모든 것, 대세에 거스르고 대항하는’ 증인들이 된다. 그들은 ‘사탄이 있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마녀 사냥 등 교권에 의해 희생된 여러 사건들이 생각난다.
14절 – 정치와 결탁한 교회는 순수함을 잃게 되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게되고 이는 자연히 행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15절 – 이것은 결국 정치, 계급, 교권주의 등의 결과를 초래하는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말미암는다. 개정판에는 ‘있도다’라고 끝나는데, 원어에는 ’ 내가 미워한다’라고 또 다시 말씀하신다. 얼마나 미워하시면 두 번이나 미워하신다고 말씀한다.
16절 –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회개를 요구하시며 그러지 않을 경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님의 말씀, 여기서는 심판과 사망을 뜻하시는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모습이지만 ‘그들’은 주님에 대항하는 거스르는 자 사탄이다.
17 – 다시 이 문제는 다만 세상과 결탁한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받아야할 교훈이다. 각 교회가 다르지만 이러한 문제는 어디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들, 즉 세상과 결탁하는 것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우상을 이기고 행음을 이기고 이런 것을 야기시키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이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신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있다.
앞의 두 교회에는 영원하신 생명을 약속하셨는데 이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나’와 더불어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말씀하신다. 만나는 생명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만, 먹는 것으로서 거기에 맛을 보는 기쁨이 있다. 유혹은 견딘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이다. 사실 환난을 견디는 것은 어느 면으로 어렵지 않고, 특히 함께 하는 이들이 있으면 보다 수월해진다. 하지만 유혹을 이기는 것은 정말 어렵다. 특히 함께 한 이들이 그러한 것들에게 대해 대수롭지 여기지 않는다면 금방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 아… 그래서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이라는 상을 추가로 받는다. 이것은 감취었던 것이고 받는 이들만 알기에 정말 특별한 상이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교회에 대해 주님은 재림의 가능성을 말씀하셨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16절의 ‘내가 네게 속히 가서’라는 말씀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뒤의 두아디라 교회 즉 재림에 대한 확실한 언급이 있는 교회와 버가모 교회는 서로 연관된 그리고 이어지는 교회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버가모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으로 현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없는 교회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의 원어는 ‘고통의 냄새’라고 번역될 수도 있고 ‘제물의 향기’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둘은 서로 많이 다르게 들리지만 이 둘의 모습이 로만카톨릭 안에 있다. 로만카톨릭 자체는 주님께서 싫어하시지만 그 안에는 교회의 본질이 분명 존재한다. 그 안에서 역사를 통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존재했다. 소위 말해 성경을 지켜왔으며 그 안에서 순교자들도 있었고 선교도 했었으며 유럽권의 역사를 주도했다. ‘제물의 내음’처럼 매일 미사가 있었고, 동시에 그 안에서 마녀사냥 십자군 등 여러 가지 ‘고통의 냄새’도 있었다.
18절 –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역시 주님은 부정적이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신다.
19절 – 로만카톨릭도 분명 주님께서 칭찬할만한 것도 있고 구원도 있다. 분명 주님의 교회이다. 그리고 처음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했고 이루어낸 업적이 분명히 많이 있다.
20절 – 그런데 분명 책망할 것이 있는데 ‘교회’가 세력을 잡은 자칭 선지자 여자 이세벨 즉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인물 혹은 교권을 그냥 둔 것이다. 또 교회가 그런 상태로 있기를 방치했다. 이 이세벨은 주님의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또 지금도 그렇다.
21절 – 그녀는 음행에 대해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22절 – 결과적으로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지는데, 이 ‘환난’이라는 단어가 교회 이름 두아디라와 조금 비슷하다. 그리고 ‘침상 안으로’는 문맥 상 ‘큰 환난 가운데’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즉 침상은 큰 환난을 뜻하고 함께 행음하는, 즉 로만카톨릭에서 나온 여러 종파들 또한 역시 회개하지 (생각을 고쳐 먹지) 않으면 큰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23절 –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 (요 1:12) 하지만 ‘이세벨의 자녀들’은 사망 즉 ‘몸의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앞의 두 교회가 영생을 얻는 것과 완전히 대조된다. 아… 회개해야 하는데…!
24절 –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고 이들은 ‘사탄의 깊은 것’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주님 만을 신실히 사랑하는 이들이다.
25절 – 이들에게는 지금 그대로 순수하게 신앙을 지킬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앞의 세 교회와는 달리 이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이다. 그래서 ‘내가 올 때까지’ 즉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다.
26절 – 이기는 자들은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정치적 세력을 탐한 이들과 대조해 이들에게는 후에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
27절 – 이기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권력이 없을지라도 주님 오시는 날에는 쇠몽둥이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 주님께서도 그러한 능력과 권세로 만국을 통치하신다. 이기는 자들은 주님과 동등한 권세를 얻게 된다.
28절 – 새벽별은 주님을 뜻한다. 이기는 자는 주님을 소유하게 되고 주님을 닮게 된다.
29절 –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사데교회
사데의 뜻은 ‘붉은 자들’ 인데, 두아디라가 ‘고통’ ‘환난’ ‘제물’ 등을 떠올리게 한다면 사데는 그리스도의 피를 떠올리게 한다. 즉 두아디라가 종교적 의식을 중시했다면 사데는 그러한 의식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한, 보혈을 덮어 쓴, 즉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의지하는 종교 개혁한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 또한 ‘뜨거운 부흥’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붉은’ 것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뜻할 때도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동시에 오히려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사실 사데 교회에 대한 문맥을 보니 오히려 죄로 가득한 교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복잡한 양상을 띤 것이 사데교회이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개신교는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는가?
1절 –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를 언급하시지만 사데교회에 대해서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말씀하신다. 이미 역사를 통해 여러 모습의 교회가 나타난 것을 경험한 사데교회에 대해서는 ‘일곱 금 촛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필요없다. 다만 사데 교회가 필요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말씀하신다. 사데 교회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나타난 개신교의 모습이 많기 때문에 종교 개혁에 대해 우월감이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로만카톨릭을 비판한다. 동시에 많은 ‘이단들’을 정죄한다.
하지만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신다. 즉 각 시대의 각 교회에 동일한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곱 영들’ 그리고 다른 교회 예를 들어 ‘러시아’ ‘그리스’ 등 정교회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콥트교회 (주님의 신성만을 강조하므로 문제가 있지만)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들에게도 ‘일곱 별’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말해 ‘너나 잘해!’이다. 이단을 연구하기 보다는 참된 주님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이단은 드러난다.
2절 – 로만카톨릭의 여러 부정적인 면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은 일어났는데, 개신교는 점차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두아디라 교회의 어두운 면을 좇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경우 개신교도 두아디라의 모습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종교 개혁 당시 그 뜨거웠던 마음,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던 그 순수한 모습이 이제는 점차 사라지고 죽게 되었다. 물론 명목 상 남은 것도 있고 눈으로 보기에 ‘부흥’도 있는 것 같고 선교와 헌신도 있는 것 같다. 여러 프로그램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3절 – 종교개혁은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활자인쇄술로 일반인들의 의식 이 깨이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게된 그러한 상황은 시대적 흐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모든 배경 뒤에서 주신 분 (어떻게 받았으며) 그리고 말씀하신 분 (어떻게 들었는지) 이심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데 교회는 그 본질을 찾아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을 경우 닥치게 될 재앙은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의 재림이다. 즉 회개하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다. 처음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단순히 새벽기도나 주일 성수 등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시 지키라는 것을 넘어서 신앙 생활에 대해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으면 언제 재림하셔서도 준비되어 있어서 도둑같이 오시는 것이 아니게 된다 라는 것이다.
4절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주님의 교회에는 신실한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수는 아니고 ‘몇명’이다. 지금 교회에 출석한다고 주님의 재림 때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주님 도우소서. ㅠㅠ
5절 - 사데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이란 더이상 ‘붉은 이들’이 아니라 ‘흰 옷을 입은 자들’이다. 즉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은 분명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그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되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물론 앞절의 흰 옷은 빨아서 희게 되었다기 보다는 그 본질적으로 희고 깨끗한 주님께서 주신 옷이겠지만, 동시에 ‘더럽히지 않았다’라는 것은 주님께서 아무리 희고 깨끗한 옷을 주셔도 우리가 더럽힐 수 있고 그럴 때에는 우리가 빨아야 함을 말씀한다. (계 22:14)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고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다. 바꿔 생각해보면 생명책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이다. 복음서의 말씀 등으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지 우리의 입장에서는 배교하는 이들도 있고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본다. 그러고보면 우리 개신교는 정말 심각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고는 아마도 이 사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비교적 많기 때문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6절 – 귀있는 자가 되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소서.
빌라델비아교회
드디어 모든 교회들이 닮고 싶어하는, 꾸중은 없고 칭찬만 받은 모범적인 교회 빌라델비아교회이다. 빌라델비아는 그 뜻이 ‘형제사랑’이다. 그리고 앞에 주님께서 혐오하신 니골라당과 그의 교훈이 없는 교회이다. 성도간에 계급이 없고 서로간에 형제로 대하며 사랑으로 뭉쳐진 주님의 몸이다. 당시 소아시아는 많은 인종들이 섞여 살던 곳이었겠지만, 그 안에 인종, 언어, 빈부, 사회계층, 성별 등 여러면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모두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거듭남으로 인해 ‘형제’임을 선포하고 교제했던 공동체가 바로 빌라델비아교회이다.
그런데 사실 말이 쉽지 사회계층간에 서로 스스럼없기는 매우 힘들다. 이런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7절 –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님을 말씀하신다. 원래부터 믿고 섬겨오던 주님께서 당신을 확증하시는 말씀이시다. 빌라델비아교회는 형제사랑의 실행은 물론, 진리면에서도 뛰어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었으며 교리면에서도 탄탄한 교회였다. 그래서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 그리고 일곱 영들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이미 빌라델비아교회는 모두 숙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왕권 혹은 권세를 뜻하는 ‘다윗의 자물쇠’를 언급하시며 확답을 주신다. (열쇠라고 번역되었지만 ‘잠근다는’ 어원으로 잠그는 기능이 강한 말이라 자물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즉 권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8절 – 2장 13절의 버가모 교회의 행위는 악한 것이었지만 여기 빌라델비아교회의 행위는 주님께서 '안다' 곧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앞에 열려진 문이 있고 그 열려진 문을 닫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님께서 온전히 인정하시는 교회이므로 주님의 보좌로 들어오는 문은 항상 열려있고 그들은 아무 제약없이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 이유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은’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모든 작고 낮은 것을 가리킨다. 즉 능력과 힘을 비롯해 사회적 지위, 공간, 물건의 크기 등을 말한다. ‘천국에서 작은 자’ ‘작은 소자’ ‘작은 겨자씨’ ‘작은 양무리’ ‘작은 누룩’ 등 약 30번이 나오는 단어이다.
그렇게 보면 빌라델비아교회는 교세 확장이나 큰 건물을 건축하는 것 등 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교회 크기를 언제부터 '대형교회'로 정의할지는 쉽지 않지만 빌라델비아교회는 대형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도무지 그런 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교회가 커지려면 물론 설교도 좋아야하고 건물과 의자, 음향 시스템, 주차장 시설 등도 잘 갖추고 있어야한다. 그런데 교회가 커지면 알게 모르게 많은 누룩들이 들어온다. 이러한 누룩들에 대해 과감히 칼을 들이대면 소위 ‘상처받고’ 떠나는 교인들이 있다. (물론 분명히 권위주의나 다른 비성경적인 교회의 모습 때문에 떠나는 교인들도 있지만.)
그런데 워낙 그러한 누룩들에 대해 철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어왔다가도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교회가 빌라델비아교회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어서 교회에서도 섬김받고 높임을 받으려는데 들어와보니 주님 십자가 밖에는 말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는 좀 '인간적인' 교회로 옮긴다. 그래서 빌라델비아는 능력이 작을 수 밖에 없다. 노력을 하지 않거나 충성되지 않아서 능력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들어가는 문과 가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작은 능력'의 ‘능력’은 물론 많이들 좋아하는 ‘두나미스’이다. 그런데 사실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다시 말해 ‘작다’는 것은 ‘에계~ 이것 밖에 없어?’ 할 정도로 작은 것이고 ‘능력’은 ‘큰 힘’을 말한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기위해서 충분한 능력이었다.
9절 – 자신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께 속했고 선택받은 사람들이며 말씀 (율법)이 있다는 이들인데, 당시 유대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케 하는 큰 문제거리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또 복음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정작은 주님 외의 것을 추구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께서는 이들이 사실은 사탄의 무리임을 폭로하신다. 소위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복’을 받기 위해 교회 나오는 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자칭교회지만 실은 사탄의 무리가 된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받고 죽음에 넘겨지고 주님만 따르고 복음으로 인해 무시당하고 고통받는 것을 걸러내는 '거짓말'을 한다. 아니, 어쩌면 말은 해도 실행은 없고 열매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겉으로는 능력이 많은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이들이 빌라델비아교회에 와서 그들 앞에 절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에서 ‘절’은 ‘예배’라는 단어이다.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 사람에게 무릎꿇고 절하고 예배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절대 금하신 것이고 더우기 ‘형제사랑’ 교회에서 사람이 사람 앞에 절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허락하시고 오히려 약속하신다. 이것은 이미 빌라델비아교회의 영적 수준이 주님을 온전히 닮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온 우주에 단 한분만이 예배를 받을 수 있는데도, 주님께서 사람이 사람에게 경배를 받게 하신 것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왕권을 말하며 또한 교회의 신성을 말한다.
10절 – 교회는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믿음의 큰 부분은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인내하는 이들은 온전히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큰 약속을 하신다. 소위 말하는 그냥 ‘대환난’이 아니라 ‘시험의 때’ 즉 환난을 통과함으로 사람들의 믿음이 판가름 나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환난은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 할 때’이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소위 ‘휴거’는 빌라델비아교회 에게만 약속되었다. 물론 다른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도 주어졌겠지만,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믿음을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음으로 증명했고 인내함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시험에 이미 합격했다.
11절 – 주님의 재림을 다시 한번 말씀하시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지금 계속 존재하고 있는 교회이다. 우리의 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인가? 빌라델비아교회는 이미 가진 것만 굳게 잡아 아무도 받을 상급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 잘하고 있다.
12절 – 빌라델비아교회 중에서도 이기는 자들의 받을 상급이 어마어마하다. 워낙 충성된 교회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 건물의 기둥은 빠지면 안될 중요한 것이기에 특히 하나님 성전의 기둥은 정말 영광스러운 위치이다.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고 부러워할 지위를 얻는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그의 위에 거룩한 이름들을 기록하신다. 역시 모든 이들이 보고 부러워할 영광스러운 것이다.
13절 – 지금 교회들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나?
많은 교회들이 빌라델비아교회를 지양한다. 하지만 정말 '빌라델비아교회'를 지양한다면 몇 가지를 버려야 한다. 첫째 교권주의, 즉 교회 내의 계급은 사라져야 한다. ‘형제 사랑’만 남아야 한다. 둘째, 소위 말하는 ‘부흥’은 접어야 한다. 오히려 고난과 고통에 눈을 돌려 작은 능력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사탕발림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믿으세요. 정말 좋~~~습니다’ 라는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모두 주님께 드려야 하고요, 가진 것이 있으면 형제를 위해 내어 놓아야 하고요, 항상 주님과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하고요, 교회 안에서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야 하고요, 가정에서 항상 섬기고 본이 되어야 하고요, 사업할 때 사기 치지 말아야 하고요…’ 셋째, 이미 받은 바 있는 것을 능력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인내로 섬겨야 한다. 더 이상 ‘능력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능력을 구할 필요가 없다. 능력은 주님의 사역을 위한 것이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곧 능력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칭찬만 들은 빌라델비아교회 바로 다음에 책망만 있는 문제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온다. 왜 라오디게아 교회는 라오디게아의 모습이 되었을까?
‘라오디게아’라는 단어는 ‘사람’ 혹은 ‘평민’을 뜻하는 ‘라오스’와 (니골라당의 니코스 라오스) ‘정의’ 혹은 ‘풍속’을 뜻하는 ‘디케이’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니골라’ 당이 평민 위에 군림하는 자를 상징한다면, 라오디게아는 일반인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모습을 모인다. 둘 다 문제이다. 교회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지만, 반면에 ‘보통 사람들’이 ‘각자의 소견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즉 교회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며 특히 인본주의 문제는 심각하다. 여기에서 요즘 포퓰리즘의 문제와 미국 교회를 흔들어 놓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보게 된다.
14절 –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심을 나타내신다. 문제 많은 교회에는 무섭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정신 차리게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오히려 주님의 긍정적인 면을 세 번이나 말씀하신다.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17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자라고 생각했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교회가 부자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매우 높아 보이는, 일도 많이 하고 아주 훌륭하게 보이는 교회를 뜻한다.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은 더 아프다.
사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보다 더 능력있고 일도 많이 하고 더 똑똑한 교회였을 것이다. 아니, 빌라델비아 교회 였을 것이다. 즉 빌라델비아교회가 성장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교회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그 부요함 때문에 타락했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기에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자가 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모습에 대해 내가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회개하기 원한다. 나의 모습을 계시하니 내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15절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 역시 주님은 각 교회에 관심을 가지시고 그 모든 행위를 지켜보신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결국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죽도 밥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신다. (뜨겁다는 단어은 ‘물이 끓는다’ 라는 뜻이다.)
16절 –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고 그에 대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토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신다. 토하다는 단어는 신약에 단 두번 나온다. 개정에서 ‘토하다’로 번역한 몇 개는 사실 그냥 ‘말하다’의 뜻이다. 벧후 2:22 ἐξέραμα 라는 단어는 ‘토한 물질’ 즉 토해낸 오물을 뜻하는 명사이고, 계시록의 이 ‘에메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동사형 ‘토하다’ 이다. 아무튼 주님께서 교회를 토해 버리신다는 말씀은 무엇일까? 에베소 교회에게도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토해 버리신다고 경고하신다. 원래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소화가 되어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인데, 토해 버리면 오물로 남게 된다.
17절 – 부자라는 것은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교리에 대해 빠삭하고 그 누구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 교회 일도 열심이고 사회적인 문제도 많이 참여한다. 다른 조그만 교회들도 나에게 배우러 온다.’ 라는 부자의식이 깔려 있는 교회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실상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신다. 아… 정말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이 변하는 것 같고 여러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에 대해 만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18 절 – ‘권하노니’라는 말은 ‘상담하다’ ‘권유하다’라는 뜻이다. 즉 명령이 아니라 권유의 부드러운 표현이다. 주님은 토해낸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라오디게아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시고 부드럽게 권유하신다. 라오디게아, 그렇게 나쁜 교회가 아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 금은 그 가치가 순수한데 있다. 순수하기 위해서는 불로 그 외의 불순물을 걸러내야 하며, 그래서 비로서 가치가 있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주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 안에 불을 통과한 금이 보여야 부요한 교회이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세상적으로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시설이 있어도 주님 앞에 서면 죄와 수치가 드러난다. 흰 옷은 주님 주신 것이고 또한 우리의 회개이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자신들의 가난함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모두 ‘사서’라는 단어 ἀγοράζω 를 써서 위의 것들이 공짜가 아님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공짜가 아니다. 값이 너무 비싸서 우리가 지불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거져 주신 것이지 주님의 은혜 자체가 가치 없어서 공짜가 아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분명 위의 것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있다. ‘사다’라는 단어는 ‘매매하다’ 즉 서로 주고 받는 것을 뜻한다. 라오디게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림으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살 수 있다.
19절 –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신다. 아~ 정말 감사한 일이다. 토하시겠다는 말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경고이다. 그래서 명령하신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가치있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20절 – 보통 영접기도에 많이 쓰이지만 이것은 이미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교회와 달리 임박한 주의 재림으로 볼 수 있다.
21절 – 정말 라오디게아 교회가 문제 많고 희망 없는 교회라면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이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많은 교회들이 ‘핍박과 고난’에 대해 승리했다면 현재와 미래의 라오디게아는 그것들과 더불어, 미지근하게 만드는 ‘부요함과 유혹’을 이겨야 한다. 이기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보좌에 주께서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해주신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22절 – 주여, 귀를 열어 듣게 하소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행정은 무엇일까? ‘회중’에 의해 움직이지만 그 회중이 모두 준비가 되어있는 교회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라오디게아가 되고 만다. 그렇기에 교회의 행정과 치리는 사실 장로들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자격있는 장로들로 인한. 그렇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되는 라오디게아가 된다.
라오디게아는 참으로 한심한 교회로 비쳐지지만 그 본질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우리의 공동체가 문제가 많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 사랑하시므로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는 버림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