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서 잠간 보여준 모습에는 아직도 인간의 모습이 더 많지만 오늘 말씀에서의 주님의 모습은 그 분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신을 칭했던 요한조차 그 앞에 두려워 엎드려졌다. 사람들 중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거나 무시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심판의 날에는 우리 믿는 이들조차 주님과 대면하게 될 처음 순간에는 당당하게 서서 찬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분의 하나님 되심 앞에 두려워 엎어지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9절 – 요한은 우리와 같은 형제라고 한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형제로서 주님의 환난, 왕국(바실레이아), 참음(원어적으로 밑에 있음으로 견디는 것)에 동참함으로,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밧모섬에 귀양보내졌음을 말하고 있다.
10절 – ‘주의 날’에는 물론 일요일 즉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인 토요일 다음 날인 주일, 즉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또한 안식일 다음 새로운 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성령에 감동되어’ 라고 번역되어 있는 문장은 다른 여러 한국어 번역에는 ‘성령이 임했다’ 혹은 ‘성령에 사로잡혔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킹제임스에는 ‘성령 안에 있었다’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원어를 보면 그냥 ‘영 안에 있었다’ 혹은 ‘영 안에 있게 되었다’라고 나온다. 성령은 ‘프뉴마티 하기오’지만 여기에는 ‘하기오’가 없다. ‘에게노멘’이라는 단어는 ‘였다’ ‘되었다’의 뜻이다. 육신을 좇고 육신 가운에 있으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이 영 안에 있으면 가능해진다. 요한은 자신은 홀로 유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영 안에 있을 때 그의 등 뒤에 주님의 강한 임재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11절 – 유배되어 온 사람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실 줄 알았던 주님은 오히려 명령하신다. 몸으로는 유배되어 있는 요한이지만, 그는 아직도 주님께 쓰임받는 사역자였다. 주님께서 처음 하시는 말씀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안하라’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관심이 오로지 교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고 그 외에 있던 교회들도 있었겠지만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특별히 편지하라고 명하신다. 그 일곱 교회는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몇은 사라지고 몇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어에는 처음 부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도 한글 킹제임스역에는 있는데 개역에는 없구나…
12절 – 영 안에서 경험한 것은 몸을 돌이킬 때 확실해 진다. 신기한 것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서 주님을 먼저 볼 것을 예상했는데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곱 금 촛대이다.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며 금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존재들이 바로 교회들이다. 주님은 교회들 가운데 계시고 떠나지 않으신다.
13절 – 그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보였는데 처음에는 주님이셨는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요한 생전 보던 주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께 있었을 때는 긴 옷을 입는 것을 삼가라 (막 12:38)고 하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신다. 그리고 왕으로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14, 15, 16절 – 완전히 변화되신 무시무시한 주님의 모습이다. 옛 뱀이 용으로 커지게 된 사이에, 주님도 가만있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강하신 모습으로 심판주로서 왕의 왕 주의 주의 모습이다. 능력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쥐어져 있다.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리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입으로 봐서 이제는 더 이상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시기만 하는 주님이 아니시다. 처음 오셨을 때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셨지만, 두번째 오실 때는 무시무시한 심판주로 오신다.
17절 – 이런 주님을 뵙게 되면 자연히 무너져 엎드러져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이런 주님을 뵙기 전에 이 땅에서 사랑이 많으시고 참아주시는 주님과의 교제에 힘써야겠다. 그런데 주님은 사랑하는 그 제자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아~! 주님은 아직도 사랑과 은혜와 위로가 충만하시다. 그런데 여기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로 주님은 당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 그 분을 대할 때의 두려움, 그리고 장차 임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앞에 있지만 주님은 그러한 두려움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주님을 알 때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계시록의 주제는 주님의 임재하심이요 주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환란 중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처음과 마지막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18절 – 주님은 전에 죽임당하셨지만 부활하셨고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요한이 아니라 주님 당신께서 아멘하신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사망과 음부의 자물쇠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고 여는 것이 아니라 잠그는 의미가 더 강하다. 원어 '클레이스'의 어원이 '잠근다'는 것을 뜻하는 '클레이오'에서 왔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능력을 제어하고 굴복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19 절 – 그래서 기록해야 하는데 이 기록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 된다.
20절 – 주님께서 해석해 주시지 않았으면 별별 해석이 다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주님은 일곱 별이 일곱 교회의 사자 (천사, 메신저)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계시록의 여러 부분의 해석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이상대로 해석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성경에서 reference를 찾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당시의 문화는 둘째 문제이다. 이미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은 2천년전 정치와 종교에 힘없이 당하고 죽어가신, 어떤 면으로는 무기력해 보였던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 능력의 하나님의 모습임을 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주님을 오늘 새롭게 만나기 원합니다. 두려워말라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 앞에서는 엎드러져 죽을 죄인이지만 주께서 내 위에 손 얹어 주심을 바라며 영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