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 혹 이상주의라는 용어는 국제관계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개인적 측면에서 말할 때 현실주의자라고 하면 미래나 이상주의적인 것에 관심없이 바로 닥친 현실에 가치를 두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결국 현실주의자는 모든 것을 지금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 특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자는 현실주의자 같이 들린다. 7-8절에서는 현실에서 내가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고 만족하며, 특히 9절 결론 부분에서는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고 하면서 마치 아내도 재산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려서 모든 것을 물질로, 계산으로, 또 소유로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현실에서 열심히 일해도 이런 소박한 삶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나?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소망이 없는 이들, 누리고 싶어도 누릴 것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하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과 나누라고 하신다 (오병이어, 청지기 히 13:16 등). 그들의 가정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요 19:27). 그래서 교회는 확장된 가정이 된다.
믿는 이들은 이상주의적이기만한 사람들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한다. ‘발은 땅에 머리는 하늘에’ 라는 말 처럼 믿는 이들은 사실 이상적 현실주의 혹은 현실적 이상주의자들이다.
미래학자들이 사실 ‘미래의 현실’을 추구함으로 어떤 면으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듯, 천국은 이미 왔지만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실체이며, 믿는 이들은 앞으로 이땅에 온전히 임할 주님의 나라를 미리보고 그 안에서 산다. 힘들고 부조리가 가득하지만 현실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누리고 삶으로, 주님 주신 이상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활이 없다면 현실주의적인 모습만 남게 된다 (고전 15:19). 하지만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에 발은 땅에 두어도 머리는 하늘에 둘 수 있다.
주님, 우리에게 소위 ‘멋진 신세계’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의 실제는 오히려 우리가 지금 누려야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상을 오늘 현실 속에서 살아내게 하소서. 주께서 주신 천국의 이상으로 현실에 급급한 삶을 사는 것에서 구원하여 주시며, 주님 주신 부활의 능력으로 현실을 이기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