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믿는 자들의 정체성 보다는 하라 하지말라 등의 말씀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 이유는 야고보서를 받는 수신자들에 대해 처음부터 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임을 말한다.  즉 이 편지는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였고 그것은 그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이었다.

성경의 순서를 정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드러나는데, 야고보서는 하필 믿음을 깊이 다룬 히브리서 다음에 나온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에 대한 여러가지 것을 다루고, 특히 배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난 후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을 강조한다.  1장 마지막 절에서는 ‘경건’에 대해 정의하기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매우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으로 예수님께서 성장하시는 것을 누구보다 옆에서 봐왔고, 전설에 따르면 요셉은 일찍 죽었다고 하는데 (진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인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주님의 동생들이 누구보다 주님의 인간적인 면을 가장 많이 접했을 것이다.  그러한 야고보가 1장 1절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오늘 말씀 2장에서는 예수님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며 그의 육신의 형인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육신의 형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자신의 친형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건 놀라운 믿음이다.

재미있는 것은 2장 2절에서 야고보서의 수신자가 흩어진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데, 개역에서 ‘너희 회당’이라고 번역한 것이 ‘모임 meeting assembly’라고 번역한 여러 영어 번역보다 더 낫다.  원어에서는 ‘시나고그’ 즉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곳에 지었던 모임 장소인 ‘회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에서 모일 때 발생했던 차별의 문제를 드러내는데,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교회 내의 차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지금 야고보는 모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아니면 너무 당당하다.

회당은 아직도 유대교의 색이 짙은 장소였고, 다시 1장을 보면 야고보는 지금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밖 일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들은 관습적으로 회당에서 모여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는 이들인데, 지금 야고보는 당당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대인들 사회 속 특히 회당에서 모일 때 차별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 말씀을 오늘에 적용한다면 이 차별의 문제는 자신들이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일지도 모른다.  재물의 부요는 물론이고 성경적 지식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직분을 직분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직위나 상위 계급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하는 문제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것에 대해 ‘악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차별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저는 정말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사실 차별을 제가 제일 많이 당해야할지도 모르는데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지식있는 자나 없는 자 모든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압니다.  모두가 죄 안에서 상처받고 열등감 있는 이들이니까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 오늘날 교회에서의 직분자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들이 주님의 겸손을 온전히 배우게 하시고 정말 영광의 주님을 매일 뵐 수 있게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