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다. 아굴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솔로몬이 잠언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아마도 솔로몬 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잠언을 쓴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아굴이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라고 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디엘과 우갈의 뜻이 지치다 쇠약하다 등이라고 한다. 마치 창세기 4:26에 셋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나 삶을 살다보니 참으로 처지가 딱하고 연약하다. 그래서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다.
이디엘이 아굴의 아들인지 또 우갈이 이디엘 아들인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아굴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르며 모든 지치고 쇠약한 인생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굴의 말이 재미있다. 어릴 때 이 말씀을 읽으며 알아차린 것은 아굴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하는 2절 말씀이 정말 아굴이 짐승처럼 지혜가 없어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후에 나오는 구절들은 그가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묵상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4절 끝 ‘너는 아느냐’라는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 실존적 질문이다.
많은 것을 모르는,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인생들이 마치 모두 다 아는 양 잘난체하며 살아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아직은’ 이라는 말을 쓰며 헛된 소망을 붙잡으며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고 한다. 비신자는 물론이지만 신자들은 어떤가?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너는 아느냐?’ 혹은 ‘나는 과연 제대로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문은 의심에 의한 질문이 아니라 회개를 이루게 하는 자체적 평가를 위한 질문이다.
자신이 짐승같고 지혜가 없다고 고백하는 아굴은 인생에게 너는 짐승보다 나으냐 라는 질문을 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짐승만 못함을 고발한다. 짐승은 자신의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인생의 욕심을 그칠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굴은 계속해서 그의 인생의 목적이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너무 가난하지도 혹은 너무 부하지도 않게 하심을 구한다. 바울의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8)’ 라는 고백과 같다.
주님, 이 아침에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교리적으로 배운 것들이 나에게 생명으로 화하기 원합니다. 주께서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기 원합니다. ‘너는 아느냐’ 라는 질문에 ‘아멘 제가 압니다!’ 라고 자신있게 답하기 원합니다. 나를 알게 하시고 나에게 지혜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