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말을 해도 속마음은 상대를 얏보거나 해하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거칠게 말해도 마음은 여린 사람이 있다. 어떤 영화에서 ‘그는 거리를 두기에 아주 좋은 사람이야’ 라는 대사를 들었다. 처음에 와~ 저렇게 말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거리를 두기에’ 좋은 사람이다. 즉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이러한 대화법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를 보면 그가 악인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는 골 4:6처럼 선한 마음으로 모난 것 없이 잘 스며드는 소금처럼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오늘 큐티 해설처럼 게으름의 문제가 죄의 문제이듯 말하는 것도 그 근본은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눅 6:45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오늘 잠언 말씀과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불교에서는 ‘적선’이라고 해서 ‘선을 쌓는’ 문제를 말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선을 ‘쌓는다는’ 개념이 없고 오직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주셔야만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우리 자신이 쌓는 선은 한계가 있고 또 원어에서는 ‘쌓다’라는 단어가 동사가 아니라 ‘보고 (보물창고, 떼사우로스)’라는 단어가 쓰였기 때문에 이 ‘보고’가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주님께서 이루시고 주시는 것이 있는 동시에 우리가 받아 누리고 행하는 면도 있다.
야고보는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리고 4:8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며 ‘두 마음’이라는 말을 썼다. 우리 말에는 ‘마음’으로 번역됐지만 원어는 ‘두개의 혼, 딥수코이’ 즉 ‘two souls’ 인데 영어에는 또 doubled-minded라고 번역되었다. 성경에서는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라는 말씀처럼 마음과 혼과 생각이 다른 언어이지만 동시에 비슷하게 쓰일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새로 주신 선한 마음과 죄 가운데 태어나 해결함 받아야 하는 악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바울은 롬 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증거하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결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생각’은 ‘쁘로네모’라는 단어로 ‘기질’이라는 단어다. 즉 육적인 기질은 사망이고 영적인 기질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단어로 바꾸면 좀 더 이해가 쉽기 때문에 아마도 ‘생각’으로 번역한 것 같다.
말은 나의 마음에서 발원하여 생각을 통해 입으로 나온다. 나는 본래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입과 혀에 재갈 물리지 않으면 나의 죄된 정체가 드러난다. 오늘 말조심 하기 위해 나의 쁘로네모를 영에 두어야 한다.
주님, 말에 대한 문제는 정말 쉬운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바로 내 속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임을 압니다. 은혜로운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에도 얼마 있지 않아 내 입으로 불평과 어리석음을 쏟아내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의 마음은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오니, 주님 의지함으로 내 입에 재갈 물리기 원합니다. 오늘 나의 말이 소금을 고루게 치듯 말로 섬기는 사역을 하게 하소서. 나의 기질이 아니라 주님의 어떠함을 말해내는 것도 귀한 사역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