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진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것이므로 거기에 따른 열매와 표적이 증거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 말씀 21절은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데,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단지 박애주의나 인권보호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오늘 큐티의 제목이 ‘원수까지 변화시키는 절제의 힘’인데, 본문에 ‘원수’라는 단어는 21절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원수에게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을 박애주의나 인권주의 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은 결국 비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정체성이다.  원수를 배부르게하고 또 갈증을 해소하게 하면 그들이 힘을 얻어서 다시 나를 대항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사실 현실적으로 거의 그럴 수 밖에 없다.  6.25 당시 포로로 잡은 수많은 인민군에게 미군정은 포로 수용소 안에서 충분한 음식과 휴식을 제공해 줬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안에서 붉은기를 나부끼며 시위를 해댔다.  역사적으로 원수를 혹은 라이벌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오히려 자신이 당한 예가 수 없이 많지만, 역사적 예와 논리나 상식을 넘어서 말씀대로 행할 때 두 가지의 것이 분명해지는데, 하나는 그런 은혜를 베푸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임을 그들이 알게 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증거하는 것이다.  그럴 때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친구로 변한다.

 

예수를 믿어도 당당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해서이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친 것을 안다면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주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는 손익 계산을 먼저 합니다.  미래를 걱정합니다.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러한 것은 세상이 더 지혜로운 것을 압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마귀를 부끄럽게 하는 그런 증거의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주님을 더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