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단지 ‘고통의 날’ 혹은 ‘환난의 날’ 아니면 ‘재앙의 날’ 이라 먼저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날’이라고 한 것은 그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단지 자연 재해나 혹은 강대국이 영토확장만을 위해 침략하는 날이 아니라 여호와를 떠난 인생들에 대한 ‘심판의 날’ 또는 ‘보응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에 대한 대비책은 인간적인 재해 방지 마련이나 외교적인 노력 혹은 국방력 강화가 아니라 먼저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모이는 것’이고 규례를 지킴으로 겸손하게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겸손하게 여호와를 찾는다 해도 심판이 완전히 비껴 가거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2:3에는 ‘혹시… 얻으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이 깨끗하고 겸손하게 산다고 해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나만의 안전함과 구원을 바랄 수는 없다. 그것은 이기적인 구원이다. 여호와의 날을 야기하게 된 총체적인 난국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세상에 대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선포해도 잘못 선포했거나 그 선포함을 삶 속에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이러한 수치를 모르는 백성도 모이라고 하신다. 모여서 말씀을 듣고 겸비하고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하신다. 난 얼마나 수치를 모르는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며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말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며 산다. 더우기 단독으로 하길 좋아하고 무언가 함께 하기를 버거워 한다. 세상의 악함에 대해 떠난 기차 마냥 손놓고 있다.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 대해 요행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나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다. 함께 모여 주님을 높이고 말씀을 배우며 피차 가르치고 떡과 잔을 나누라고.. 주님 음성이 감사하다.
주님, 나의 삶 속에 예배가 있게 하소서. 단지 의식만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날을 예비할 수 있는 그러한 예배가 매일 삶 속에, 오늘 하루 있게 하소서. 서로 위해 기도하며 주님 뜻을 구하고 수치스러운 것에서 떠나게 하소서.